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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7)제71화 경동 80년(15)시지 교육
경성고등보통학교 시대에는 1년을 3학기로 나눴다.4∼8월이 1학기,9∼12월이 2학기, 다음해 1∼3월이 3학기였다. 지·필·묵 등 일체의 학용품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심지어는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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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5)제71화 경기 80년
한일 합방이후 경기는 한국교육의 총본산으로 발돋움했다. 합방직후인 1910년 10월11일에는 수학원학생을 경성고보의 해당학년에 수용했다. 수학원은 원래 영친왕 이은의 교육을 담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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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4)제71화 경기 80년(12)하정 여규형 선생
하정 여규형 선생(1849∼1922). 경성고등보통학교의한국인 교사 중 당대의 석학을 꼽으라면 단연 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본인 교사의 민족적 차별 속에서도 한학의 독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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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3)제71화 경기 80년(11)
합방 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인 관리가 대거 현직에서 물러났는데 같은 현상은 교육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교육의 발효와 함께 일본인 교사가 대거 진출했음은 물론 관립영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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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2)제71화 경대 80년(10)경성고보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제반규정은 물론 조선교육령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교육령에 의하면 고등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은 4년으로 되어있고(제12조).또 그 입학자격은 나이 12세 이상으로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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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화 경기 80년 한일합방|식민지 오욕 시작, 울분으로 자퇴 늘어 민도에 맞춘다는 구실로 학제도 차별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르 합방된 뒤 해방이 될때까지 우리민족은 30년간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통치를 받게된다. 합방은 곧 식민지시대 교육의 시작을 뜻했다. 합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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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제71화 경기80년-정구충
나는 계산소학교(현 대동상고자리)를 졸업했다. 계산학교는 우리 나라 개화운동가인 유길준(갑오개혁 때 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유성준형제가 설립한 귀족학교로 설립자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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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화 경기 80년사|일인교사 급증 수업시간에는 한국인 교사가|통역지원자 해마다 늘어 입시경쟁 치열
을사보호 조약 후 통감부의 정치와 더불어 1906년 8월초부터 궁내부와 내부이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이 임명되어 이른바 차관정치가 실시되었다. 학부에도 일본인으로 차관이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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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학제개편… 명칭바꿔 4연제로 사립출신 흡수위해 l년과정 예과둬
일본은 1906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이 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반대하여 이준 열사가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서 자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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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7)제70화 야구에 살다(5)졸엄
학생들에게 교과서·지필묵, 심지어 급료까지 지급한 관립중학교는 공부릏 잘한 학생은 더욱 특별히 우대해주었다. 매월 실시되는 월말시험에서 우등한 학생은 그 학급 안에서 승좌하고 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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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경제 80년
관립중학교의 학생은 정부로부터 상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학교당국은 서당이외의 공부를 도외시하던 시절에 창설된 관립중학교였던만큼 학생들에게중학교가 서당보다 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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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5)
「관립중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서반과 동반으로 편성됐다. 고등소학교를 졸업해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은 서반이었고 그렇지 않은 학생은 동반이었다. 입학한 학생들의 교육정도에 차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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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4) 개교
1900년 10월 3일 관립 중학교가 개교되었을 때 학교위치는 서울 화동, 교사는 교장이하 7명, 학생은 85명이었다. 학생모집은 지금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관립학교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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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9) 제59화 함춘원시절 김동익 (30)|「국대안」 찬반으로 좌익과 격돌|46년10월에 설립, 학장엔 심호섭
함춘원사상 격동의 소용돌이속에서 혼란과 분쟁이 가장 격심했던 때는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이 발표된 전후일것이다. 사랑, 봉사, 진료, 교육, 연구의 분위기로 충만해야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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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8) 제59화 함춘원시절 김동익(29)|한심석등이 자치위원회구성, 교수뽑아|1년뒤 이문호·나건영등 34명을 배출
서울 소격동에서 경성의학전문학교(나중에 서울외과 대학으로 개명)가 우리 손으로 창설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해서 창경원옆 함춘원에서는 경성대학의학부가 새로운 모습으로 출발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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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년전의 감격 지금도 못잊어"
『누르면 누르는대로 묵묵히 참으며 살아오던 백성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압제자에게 반항의 맨주먹을 휘둘렀던 그날-. 필생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읍니다.』 「3·1운동」 당시 경성여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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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텔리폰」을 「득률풍」으로|주민들 화륜선보고『괴물』|두모포에 변찰소(경찰서)설치|1901년 경부선 철도부설공사에 때맞춰|「기모노」걸쳐입은 일본창녀들 상륙시작|1884년 장기∼부산간 해저전신 개통
개항뒤 부산포의 사정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일본의 문물이 부산포를 통해 전파되었다. 돛단배가 한가롭게 오가던 부산포앞바다에 검은 연기를 내뿜는 화륜선(화륜선)이 입항하자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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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경기고 화동교사서 마지막졸업식
중등교육의 발상지로 우리나라 제1의 명문교 위치를 지켜온 경기고교가 10일 상오10시 서울종노면화동1의17 현 교사에서는 마지막인 72회 졸업식을 거행, 75년의 역사를 지닌 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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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400)|전국학연(12)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전주북중시절-. 지리와 역사를 담당한「노다」(야전)라는 일본인 선생이 있었다. 그는 일제가 중국대륙을 침공키 위해 일으킨 1939년의 노구교사건 때 부상당한 상이용사임을 큰 자랑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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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9)제36회 양악백년
경성에서 독주회도 하고 음악잡지도 발간하면서 한편으로는 후진도 양성하던 난파는 그럴수록 자신이 더공부를 해야겠다는것을 느꼈다. 그래서 난파는 192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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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제36화 양악백년(5)|김영모
「우에노」에 들어가던 그 핸가 나에게는 또 큰 기쁨이 찾아왔다. 내가 음악공부를 하고있는 것을 누구 보다 이해해서 할아버지 몰래 성원을 아끼지 않던 어머니가 대지주인 외삼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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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제36화 양악백년 (5) 김영환.
「우에노」에 들어가던 그핸가 나에게는 또 큰 기쁨이 찾아왔다. 내가 음악공부를 하고있는 것을 누구보다 이해해서 할아버지 몰래 성원을 아끼지 않던 어머니가 대지주인 외삼촌에게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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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에 경성고보 입학, 영어에 뛰어나 샌님 「타입」, 얼굴 검어 「기왓장」별명
1915년 3월 4일 고향인 사산에서 대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박헌영은 경성고보(현 경기고교)에 입학했다. 입학당시학생들의 평균연령이 16∼18세였는데 비해 그해 그의 나이는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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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색깔
지금부터 40여년 전 경기여고에 다닐 때 얘기다. 체육시간에 두 편을 갈라놓고 경주를 하거나 줄다리기를 할 때는 의례 빨간 편과 흰 편이란 이름을 붙인다. 응원을 할 때도 빨간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