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학제개편… 명칭바꿔 4연제로 사립출신 흡수위해 l년과정 예과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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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은 1906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이 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반대하여 이준 열사가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서 자결해 민족의 정기를 과시하고 친일파인 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이 민중의 손에 불타버리는 합의가 벌어지는 가운데 일본은고종을 퇴위시키고 황태자에게 국사를 억지로 떠맡겼다.
국가권력은 일본인의 통감부로 넘어갔다. 행정과 입법은 물론 고등관리의 임면도 통감의 승인과 동의를 받아야하고 일본인을 한국의 관리로 임명토록 했다.
교육부문이라고 해서 일본인의 손길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통감부가 설치된지 몇개월이 안돼 학제가 변경되었다.
1906년8월31일 칙령 제42호로 고등학교령이 공포되어 관립중학교는 관립 한성고등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고등학교령은 수업연한을 4년으로 하고 입학자격을 12세이상의 보통학교 졸업자, 또는 동등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로 규정했다. 「중학교」를 「고등학교」로 개칭했을뿐 종전의 중학교 교육연한등과 고등학교의 것이 다를바가 없었다.
바뀐것이 있다면 그 이전까지의 중학교는 소학교의 상급학교로서 대학의 고등교육에 대비하는 중간 교육기관이라는 것이 이름에서부터 나타나있지만 일본침략주의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고등학교는 이땅의 최종학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일본의 피지배 민족에 대한 우민정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등교육의 목적은 국가지도자의 배출에 있기보다는 「양민」을 기르는데 있었다. 실업사상과 실용주의 교육이 특히 강조되었다. 이같은 방침은 1910년 한일합방때까지 이어나간 교육주의였다.
이 새로운 고등학교령에 따라 관립 한성고등학교가 최초의 고등학교로 발족했다. 학부당국은이 학교를 명실공히 최고수준의 학교로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임시학부 확장비중 8천2백원을 들여 교사를 증축해 고등학교로서의 출발에 임했고 1909년에 다시 2만2천여원을 투입해 교사를 증축했다.
관립 한성고등학교의 개교와 동시에 학부령26호로 이 학교에 수입연한 1년의 예과를 둘 수 있다는 규정이 공포되었다.
예과는 관립중학교 시절의 동반과 같은 것이었다. 즉 관립중학교 매는 소학교 정규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입학자를 동반에 수용했는데 이 고등학교에서는 보통학교 (같은 해 보통학교령에 따라 소학교가 보통학교로 바램)를 졸업하지 앉은 학생을 예과에 넣었다.
아직도 신교육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해 보통학교 졸업자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 예과 설치의 주요 원인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데 있었다.
을사조약올 전후하여 국민들이 정부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품고 있었기때문에 일본인의 주도권 밑에서 운영되어 일본어를 주요과목으로 가르친 관립보통학교에 자녀를 보내려하지 않았다. 보통학교를 대부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풍조였기 때문에 관청에서 억지로 권하면 마지못해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형편이었다.
예를 들어 한성고등학교가 개교한 해에 총22개 보통학교의 학생은 전학년을 통틀어 1천9백24명에 불과했다.
그런데다가 이들 흔치않은 보통학교 졸업생마저 그 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한 사학으로 흩어졌다.
일본침략에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로지 교육의 힘으로 민지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생각한 우국지사들에 의해 사립학교가 각지에서 설립되고 있었던 것이다.
1905년만 해도 보성학교(현 고려대)·양정의숙·광성실업학교· 한성법학교가, 1906년에는 휘문의숙·진명여학교·보성중학교 (현 보성고)· 숙명여학교· 보인학교· 양규의숙이 세워졌고, 1907년에는 대성학교· 오산학교· 중동학교등이 설립되었다.
따라서 학부당국은 사립학교로 분산된 사립보통학교 졸업자와 비보통학교 졸업자를 흡수하기 위해 관립 한성고등학교에 특별히 예과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과는 관립중학교시절의 동반과 같이 과도적인 것이었다. 1909년에는 폐지되었으니 말이다.
이때쯤에는 보통학교령의 공포이후 초등교육이 일반화되고 1908년의 사학정리로 관·공립학교에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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