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아이] 멕시코 대선의 핫 이슈, 물 부족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라틴아메리카의 강국 멕시코 정가에 보기 드문 인물들의 경쟁과 함께 새로운 화두가 등장하고 있다. 멕시코에선 오는 6월 2일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을 포함해 2만 명 넘는 선출직을 뽑는 총선거가 실시될 예정이다. 1824년 연방정부 수립 이후 가장 판이 큰 선거다. 그중에서도 단연 관심이 쏠리는 자리는 대통령직이다. 특히 올해는 멕시코 역사상 최초로 유력한 후보 두 사람 모두 60대 여성이라는 점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두 여성 정치인은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집권 좌파 국가재건운동(모르나)당의 후보인 클라우디아 셰인바움(62) 전 멕시코시티 시장과 우파 야당 연합체인 광역전선의 통합 후보 소치틀 갈베스(61) 전 상원의원. 이들은 비슷한 나이 외에도 이공계 출신이라는 점, 무엇보다 환경 문제에 적극적으로 맞서겠다는 공약 때문에 주목받고 있다.   오는 6월 멕시코 대선의 유력한 후보 셰인바움. [AFP=연합뉴스] 멕시코는 경제·마약·치안 등 복잡다단한 문제들로 골치를 앓고 있지만 고질적인 물 부족사태는 이제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어버렸다. 엘니뇨 현상으로 강수량이 줄어 십 년 넘게 계속된 가뭄은 현재 최악의 상태이다. 국토의 80%가 가뭄에 허덕이며 전국 저수지의 저수량은 40%대로 줄었고 주민들은 시도 때도 없는 단수에 고통받고 있다. 상황이 최악인 동남부 치아파스주 주민들은 세계에서 코카콜라를 가장 많이 마신다는 오명까지 얻었다. 마실 물이 부족하다 보니 주민들은 물 대신 지역 내 공장에서 생산하는 코카콜라로 갈증을 해소하며 심지어 아기에게도 콜라 젖병을 물린다고 한다. 끔찍한 일이다.   오는 6월 멕시코 대선의 유력한 후보 갈베즈. [EPA=연합뉴스] 이런 물 부족 사태에 대응하고자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공로로 2007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셰인바움 후보는 지속가능한 물 활용 30년 계획을 갖고 나왔다. 정부뿐 아니라 농업·산업·서비스업 등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인 액션을 취하겠다는 공약이다.   상대편의 갈베스 후보는 셰인바움의 집권당이 지난 6년간 물 부족 사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전국의 상수도망을 늘리고 기존의 파이프 누수 복구에 우선 힘쓰겠다고 발표했다.   1억2000만 인구의 절반이 안전한 물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멕시코. 두 후보가 내놓은 방안 모두 물 부족 사태를 이른 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누가 되든 멕시코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 임박했다는 사실. 수많은 남성이 해결하지 못했던 이 난제를 여성의 리더십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2024.04.30 00:22

  • [글로벌 아이] 워싱턴에서 조금씩 커지는 한국 핵무장론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어쩌면 핵무기의 한반도 재배치가 먼 미래의 일이 아닐지 모른다.’   리처드 롤리스 전 국방부 부차관,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전략·전력개발담당 부차관보 등 미국 내 손꼽히는 외교안보 전략통을 최근 인터뷰하면서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다.   이들은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이며 미 본토 공격 능력을 갖췄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핵우산)에만 의존하는 데 대한 한국 내 우려와 의문을 이해한다는 전제도 같다. 볼턴 전 보좌관은 “확장억제 능력이 가상이 아니라 바로 한국에 있다는 확신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고, 롤리스 전 부차관은 ‘나토식 핵 공유’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지난해 3월 28일자 북한 노동신문에서 공개된 전술 핵탄두 ‘화산-31’형. [노동신문=뉴스1]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집권 시 유력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거론되는 콜비 전 부차관보의 경고는 더욱 극적이다. 미국이 대(對)중국 군사적 우위를 잃은 상황에서 “뒤처진 핵 균형을 위해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4월 한·미 핵협의그룹(NCG) 신설을 골자로 한 ‘워싱턴선언’의 한계를 지적하며 미국이 자국의 도시를 북한의 핵공격에 희생하면서까지 한국 안보를 지켜줄 거라고 약속할 수는 없다고 한 대목은 오히려 솔직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사실 그는 5년 전만 해도 “한국의 핵무장에 반대한다”(2019년 VOA·미국의소리 인터뷰)고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간 북한의 거듭된 폭주에 지금은 “미국의 재래식 전력 지원에 대한 기대를 줄이고 직접 한반도를 방어해야 한다”며 한국의 자체 핵무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설파한다.   미국 정부의 공식 기조는 여전히 ‘한반도 비핵화’에 맞춰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통화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공약’을 재확인했다. 한국 핵무장시 동아시아 핵확산의 시발점이 될 거란 우려도 미 조야(朝野)에 여전하다. 다만 금기시해 오던 한국 핵무장론이 ‘중국 견제’라는 대전제 속에 공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은 분명 심상치 않아 보인다.   비핵화의 길이 난망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한·미 군사동맹을 고도화하고 자주국방 역량 또한 획기적으로 강화해 확장억제 역량에 대한 의문을 불식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남북 물밑대화에도 계속 힘써 우발적 충돌을 미연에 막아야 한다. 북핵 문제는 손이 묶인 상황에서 손을 써야 하는 난제 중 난제가 됐다.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2024.04.26 00:24

  • [글로벌 아이] ‘저축에서 투자로’ 일본의 변화

    이영희 도쿄특파원 『1시간에 마스터하는 신(新)NISA 교과서』, 『신NISA 완전공략: 월 5만엔으로 시작해 1억엔 만드는 법』….   얼마 전 도쿄(東京) 긴자의 한 서점을 찾았다가 신기한 광경을 봤다. 매장 한가운데 ‘신NISA’와 관련한 책이 수백 권 쌓여 있고, 많은 이들이 집중해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NISA란 ‘Nippon Individual Saving Account’의 준말로 정부가 소액 주식투자자에 제공하는 비과세제도를 말한다. 서점 풍경이 말해주듯, 요즘 일본 금융 시장의 최고 히트 상품이 바로 신NISA다.   2014년 시작된 제도가 올해 유독 관심을 모으게 된 건, 정부의 과감한 개혁 때문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2022년 11월 발표한 ‘자산소득 배증 플랜’에서 국민의 노후 자산을 2배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하며 투자 촉진 프로그램 NISA의 개편을 결정했다. 올해부터 시행된 신NISA는 연간 납입 한도가 기존 120만 엔에서 360만 엔으로, 총납입액은 최대 800만 엔에서 1800만 엔으로 크게 늘었다. 비과세 기간은 최장 20년에서 무기한으로 바뀌었다. 투자 대상도 일본 기업 주식과 ETF는 물론 미국 등 글로벌 주식까지 모두 가능하다.   일본 도쿄 니혼바시에 있는 도쿄증권거래소. 뭐든 더디게 움직이는 일본이지만 이번에는 결단도, 반응도 빨랐다. 지난해 말 기준 NISA 계좌수는 총 2263만 개였는데 올해 1~3월 사이에만 170만 개의 신규 계좌가 만들어졌다. 전년 동기 계좌개설 건수의 3배다. 특히 젊은 층, 여성들의 가입이 늘었다. 자금 유입액도 4조7000억 엔으로 전년 같은 기간의 약 3배다. NISA로 투자하는 대상은 미국 주식 등 글로벌 포트폴리오가 많지만, 올해 들어서는 신규 투자금의 약 절반 정도가 일본 주식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NISA는 일본 사회 분위기까지 바꾸고 있다. 이번에 처음 신NISA 계좌로 주식투자를 시작했다는 30대 회사원 친구는 “계좌에 찍히는 돈이 늘어나는 걸 보니 일본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웃었다. 농반진반으로 “NISA 개편은 기시다 총리의 최대 업적 같다”고도 했다. 지난달 만난 이와나가 모리유키(岩永守幸) 도쿄증권거래소 사장은 “일본 주식시장 활황이 계속될 수 있겠냐”는 질문에 “일본인은 이제야 막 저축에서 투자로 돌아섰다. 변화는 큰 물결이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한국 정부가 개인 투자 활성화를 위해 만든 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 계좌의 경우, 비과세 한도 등 여러 측면에서 아직은 ‘반쪽짜리’라는 평가를 받는다. NISA의 성공 사례를 세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영희 도쿄 특파원

    2024.04.23 00:26

  • [글로벌 아이] 차이나 쇼크 2.0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지난 한 달 동안 베이징 외에 상하이·자싱·시안·허페이와 대만의 타이베이·화롄 등 6~7개 도시를 오가며 달라진 중국을 체감했다. 시 정부가 글로벌 투자 은행사 못지않게 디스플레이·반도체·전기차 선두 기업에 거액을 투자해 해당 산업 체인을 유치한 ‘허페이 모델’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당(唐)나라 의상 대여점이 성업 중인 시안의 대당불야성(大唐不夜城)에서는 ‘새로운 중국 스타일 플러스(新中式+)’로 불리는 복고주의 열풍을 목격했다. 대만에서는 화롄 대지진 취재 틈틈이 2030년대까지 1나노급 첨단 파운드리 양산 로드맵에 따른 촘촘한 북부·중부·남부 반도체 단지의 조성 계획을 귀동냥했다.   지난달 23일 밤 시안시 대당불야성에 당나라 전통복장 사진을 촬영하는 중국인이 가득하다. 신경진 특파원 베이징에서는 샤오미(小米)의 전기차 SU7(Speed Ultra 7) 체험도 했다. 전 세계를 공습하고 있는 C커머스의 대표주자 테무(TEMU)의 초저가 시스템도 취재했다. 모두 ‘차이나 쇼크 2.0’이란 표현이 걸맞은 격변의 현장이다.   한국이 총선에 몰입했던 한 달간 미국·중국·유럽은 ‘차이나 쇼크 2.0’을 둘러싼 신(新) 삼국지를 펼쳤다. 먼저 미국. 재신(財神)으로 불리는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8일 베이징 회견에서 ‘차이나 쇼크 2.0’을 말했다. “인위적으로 값싼 중국산 제품이 세계 시장에 홍수를 이룰 때, 미국과 다른 외국 기업의 생존 가능성이 의문시된다”며 전기차·리튬배터리·태양광의 과잉생산을 우려했다. 그는 “10여 년 전 중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으로 저가의 중국산 철강이 세계 시장에 범람하면서 전 세계 산업이 쇠퇴했던 현실을 다시 용납하지 않겠다”며 날을 세웠다.   중국은 유럽의 독일 총리를 환대해 반격했다. 16일 시진핑 국가주석은 올라프 숄츠 총리와 회담에서 “중국의 전기차·배터리·태양광 수출은 글로벌 공급을 풍부하게 할 뿐 아니라, 세계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한다”며 “세계가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녹색 저탄소로 전환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고 과잉생산을 방어했다. 그러나 숄츠 총리는 이견을 숨기지 않았다. 이날 회견에서 “과잉생산을 논의했다”며 “모든 경쟁보조금은 등록돼야 한다”고 했다.   일본도 대비에 나섰다. 다루미 히데오(垂秀夫) 직전 중국대사는 최근 회고록에서 “거대한 중국시장에 진출하는 ‘공격’을 하는 과정에서, 단단히 겨드랑이를 조이는 ‘수비’를 굳혀야 한다”며 “공수양면에 전략적 사고를 갖고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이나 쇼크 2.0’은 세계 모두에 양날의 칼이다. “셰셰(謝謝)” 이상의 치밀한 공수전략이 시급하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2024.04.19 00:16

  • [글로벌 아이] 록펠러센터와 US스틸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1989년 10월 31일 뉴욕타임스 1면에 ‘일본인, 뉴욕의 상징을 사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맨해튼 한복판의 록펠러센터를 일본 기업 미쓰비시가 사들였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역사기념물로도 지정된 이 건물의 매각이 준 충격은 상당했다. 입주해 있던 GE와 NBC 방송 등 유수의 미국 기업들이 한순간에 일본의 세입자가 된 점마저 못마땅해했다.   소니가 컬럼비아 영화사를 인수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반일감정으로까지 번졌다. 지금은 할리우드 영화의 빌런(악당)이 대부분 러시아인, 중국인이지만 당시엔 일본인 재벌이나 야쿠자였다. 의회에서도 일본 자본의 투자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지난 10일 미국 백악관 국빈만찬에서 건배를 하고 있는 조 바이든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0일 백악관 미·일 정상회담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반대 의사를 재확인했다. “노동자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였다.   피츠버그에 본사를 둔 US스틸은 1901년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카네기스틸과 합병해 세워졌다. 한때 시가총액 세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노조는 차라리 미국 회사인 클리블랜드 클리프스가 새 주인이 되길 바랐지만, 반독점법에 걸려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바이든 대통령은 “한 세기 이상 미국 철강산업의 상징이던 US스틸을 미국 회사로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뜻 보면 지난 30여 년간 상황은 별로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자유 시장경제라면서 경제 논리와는 안 맞는 이유로 여전히 거래가 막혔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주 만난 한 전직 미국 관료는 록펠러센터 매입 때와 지금의 일본은, 미국에 전혀 다른 나라라고 말했다. 바이든도 선거를 앞두고 노동자 표를 의식해 그런 것이지, 연말 이후 US스틸 합병 작업은 급물살을 탈 거라고 봤다.   게다가 일본이 미·영·호주의 군사 동맹인 ‘오커스’ 협력국이 된 마당에 안보를 핑계로 보호주의를 할 명분도 사라졌다.   실제 정상회담 직후, US스틸은 주주총회를 열고 일본제철과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의 심사가 남았지만, 동맹국과의 거래를 막은 사례는 거의 없었다.   벌써 일본은 이런 지위를 백분 활용하는 모습이다. 얼마 전 미국 항만의 중국산 크레인을 모두 교체하기 위한 200억 달러(약 27조원) 규모의 계약을 따간 것도 일본 미쓰이였다.   30여 년 전 ‘엔화를 앞세운 침략자’였던 일본은, 이제 중국이란 더 큰 빌런에 함께 맞서는 동맹군으로 미국 시장에 다시 스며들고 있다.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2024.04.16 00:22

  • [글로벌 아이] 어떤 아름다운 ‘취미’

    김현예 도쿄 특파원 “당신은 왜 제 그림을 238점이나 사는 겁니까?” 화가가 물었다. 남자가 답했다. “당신은 산다, 판다고 말하지만 당신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일본인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 작품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맡겨두는 것일 뿐입니다.” 귀 기울여 듣던 화가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좋습니다.”   1997년 10월 16일,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당시 나이 80세이던 미국 국민화가 앤드루 와이어스(1917~2009)는 그렇게 자신의 작품 238점을 스사키 카쓰시게(須崎勝茂·73) 마루누마 예술의 숲 대표에게 건넸다.   지난 5일 주일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마루누마 예술의 숲 레지던스 5주년 기념 한·일 교류전에서 스사키 카쓰시게 마루누마 예술의 숲 대표가 한국 작가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고흐도 모네도 로댕도 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 5000여 점을 보유하고 있지만, 미술관은 없다. 대지진 피해지처럼 ‘위로’가 필요한 곳에서 모든 비용을 대고 전시를 하거나, 고향인 아사카(朝霞)시 박물관 등에 무상으로 제공할 뿐이다. 작지만 다부진 체구, 짧은 백발의 그를 지난 5일 도쿄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마루누마 예술의 숲 한·일 교류전’에서 만났다.   25살 나이, 큰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으면서 뛰어든 창고 임대사업. 회사는 일본의 고도성장기와 함께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일에만 빠져있던 그에게 어느 날 조부가 한 마디 던졌다. “돈이 얼마가 있든 취미가 없는 인생은 쓸쓸하다.” 서른살, 그가 도전한 취미는 도예였다. 동경예술대 학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뜻하지 않게 예술가를  꿈꾸는 학생들의 척박한 환경에 귀 기울이게 됐다. ‘학교를 졸업해도 작업실도, 돈도 없으니 꿈을 이루기 어렵다’는 거였다.   스사키는 그 길로 집 근처 대밭을 갈아엎었다. 그리고 1985년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작업실을 세웠다. 마루누마 예술의 숲 레지던스의 시작이었다. 무명의 젊은 작가들을 이곳에 불러와 작업공간 제공은 물론, 재료비 지원, 전시회 지원을 하기를 올해로 40년. ‘아시아의 앤디 워홀’로 불리는 팝아트 작가 무라카미 타카시도 20년간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 인구 14만여 명의 작은 도시 아사카시의 마루누마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선 꼭 한 번 가고 싶은 곳이 됐다. 8년 전부턴 한해 3명씩 한국 젊은 예술가를 초대하면서 한국 작가들의 발길마저 이어지고 있다. 전시회에서 만난 스사키 대표는 “취미로 인해 세상이 넓어졌고, 이젠 예술가를 키워내는 것이 내 취미가 됐다”며 활짝 웃었다. 평소 유니클로를 입고 다니면서도 반평생 낯선 예술가들을 선뜻 후원해온 아름다운 ‘취미’를 가진 이를, 우리 사회에서도 볼 날이 오길 바라본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2024.04.12 00:18

  • [글로벌 아이] 미국에 홀로 서 있는 ‘원주로’ 표지판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미국 버지니아주 남부 도시 로아노크. 한글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원주로’였다. 1964년 원주와 자매결연을 한 로아노크시가 1982년 220번 도로 500m 구간에 명명한 곳이다. 원주 시청 앞에도 ‘로아노크 사거리’가 있다.   미국은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이다. 한국인들은 71주년을 맞은 한·미 동맹 앞에 자연스럽게 ‘철통같은(iron clad)’이란 말을 붙인다. 그러면서 동맹은 당연하다고 믿는다. 시민들이 매일 지나다니는 로아노크 사거리처럼 말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로아노크시에 있는 ‘원주로’. 1964년 원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220번 도로를 원주로로 명명했다. 강태화 기자 트럼프 1기 때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던 존 볼턴으로부터 당연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한반도 정책의 목표는 한반도 통일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하는 분단 상황에 대해선 “일시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은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헌법 4조에 명시돼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헌법 4조가 당연하지 않게 됐다. 정권에 따라 통일의 대상인 북한에 대한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세 차례 김정은을 만났지만 실패했다. 그럼에도 그를 잘 아는 인사들은 트럼프 재집권 시 김정은과의 협상이 재개될 거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트럼프의 새 설계도에선 ‘운전자’를 자처했던 한국의 역할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한반도 핵 정책을 총괄했던 리처드 롤리스 전 국방부 아시아·태평양안보담당 부차관은 “한국은 참관자(observer)로 협상장 옆자리(side saddle)에 앉게 될 것”이라며 “한국의 발언권은 있겠지만, 거부권을 행사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북한 주민에게 김정은과 뭘 합의하려는지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북한 주민도 그런 이상주의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 대북 선제공격을 주장한 적이 있는 볼턴에게 “그럼 전쟁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즉답을 피했다. 대신 “북한 주민에 적대감을 추구하지 않고 정권을 압박해야 하는데, (한국 정부가) 제재를 위반하는 중국과 러시아를 방치해 왔다”고 답했다.   2012년 원주시는 주민 조사를 통해 자매결연의 상징이던 ‘로아노크 광장’을 폐쇄했다. “자매도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주민 상당수는 광장의 존재 자체도 모른다고 답했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공기처럼 당연해진 결과다. 그러나 외교에서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를 둘러싼 공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말이다.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2024.04.09 00:38

  • [글로벌 아이] 1분의 망설임도 없었다…대참사 막은 ‘용기’ 배워야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한밤중 멀쩡한 다리가 무너져 내리는 일을 다른 곳도 아닌 미국에서 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끊어진 다리 상판, 엿가락처럼 구부러진 철근 구조물, 그 아래 깔린 컨테이너 화물선. 미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프랜시스 스콧 키 브리지’ 붕괴 사고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겠지만, 그보다 더 또렷하게 기억해야 할 교훈을 남겼다.   지난달 26일 0시39분 볼티모어 선적항을 출발한 화물선 ‘달리’호에서 비상 경보가 울린 것은 오전 1시 24분 59초. 갑자기 동력을 잃고 불빛이 꺼졌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화물선은 교각과 충돌하기 직전 메릴랜드주 교통국에 조난신호 ‘메이데이(Mayday)’를 긴급 타전했다.   지난달 26일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발생한 ‘프랜시스 스콧 키 브리지’ 붕괴 사고. [AP=연합뉴스] 볼티모어 경찰과 소방 당국이 교신을 주고받으며 급히 도로 통제에 나선 시간은 1시25분45초. ‘메이데이’ 전파 후 채 1분이 안 됐을 때다. “한 명은 남쪽에서, 한 명은 북쪽에서 다리 교통을 전면 통제해주세요.”   붕괴 직후만 해도 여러 대의 차량이 다리에서 추락해 실종자가 20명을 넘을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사고 후 공개된 보안 카메라 영상을 보면 1시27분 다리를 통과한 화물차가 마지막이다. 잠시 후 1시28분44초 화물선이 교각과 충돌했고 상판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앉았다.   다리 위에서 작업 중이던 인부 8명이 강물에 빠져 구조된 2명을 뺀 나머지 6명이 실종됐다.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 있었지만 신속한 조난 신호, 그리고 곧바로 다리를 통제하고 차량 진입을 막은 당국자들이 대형 참사를 막았다.   웨스 무어 메릴랜드 주지사가 “수많은 생명을 구한 영웅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했을 때 ‘우리나라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대형 재난 앞에서 ‘관할 타령’만 하다 골든타임을 놓쳐 무고한 희생자를 낳는 일을 해마다 봐 와서다.   2020년 7월 부산시 동구 초량 제1지하차도 침수 사고에선 시민 3명이 숨지기까지 차량 통제는 없었다. 부산시와 동구청은 지하차도 관리 책임을 서로 미뤘다. 3년 뒤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2023년 7월 집중호우로 불어난 물에 충북 청주시 오송 궁평2지하차도에 갇힌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때도 차량 통제는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   위기 신호가 전파되자 1분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행동한 볼티모어 당국자들의 신속한 대처와 용기를 우리 당국자들이 제대로 배워야 한다. 올해도 같은 참사를 겪지 않으려면.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2024.04.05 00:41

  • [글로벌 아이] 시에스타 논쟁 뜨거운 스페인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식당들이 새벽 1시까지 영업하는 나라는 합리적이지 않다. 영업시간을 계속 늘리는 일은 미친 짓이다.”   최근 스페인을 발칵 뒤집어 놓은 욜란다 디아즈 부총리 겸 노동·사회경제부 장관의 말이다. 밤 10시에도 저녁 식사가 한창인 생활습관을 고수하는 나라에서 좌파 장관이 의회에서 던진 발언은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우파 정치인들은 즉각 “디아즈 장관은 우리 모두 일찍 집으로 돌아가 등불 아래서 차를 마시며 공산당 선언을 읽기 바라는 것이다”라고 받아쳤다. 업계도 반발했다. 식당 영업시간을 1시간 줄이자는 제안이 엉뚱하게도 이념 논쟁으로 번진 상황이다.   스페인 남부 도시 론다의 식당. 관광객들이 식사를 즐기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스페인은 유럽 국가 중 일과가 가장 늦게까지 이어지는 나라다. 그 이유는 태양이 절정인 오후 2시에서 일을 멈추고 열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5시에 재개하는 ‘시에스타(siesta)’ 관습 때문이다. 이 시간, 식당과 상점은 문을 닫고 길거리는 한산해진다. 농경 사회일 때 시에스타는 고단한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낮잠을 자면서 재충전하는 시간이었다. 2016년 한 조사에 따르면 아직도 이 생활 습관을 그대로 지키는 스페인 사람은 약 18%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낮의 브레이크 타임(break time)은 스페인에서는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시에스타 이후 오후 8시까지 이어지는 영업, 이에 따라 늦어지는 저녁 식사, 식사 후 술 한 두 잔 마시며 즐기는 ‘소브레메사’(sobremesa: 식후 식탁에 남아 대화를 즐기는 시간)까지. 식당들이 문을 일찍 닫을 수 없는 조건들이다. 이미 껑충 뛰어버린 종업원 인건비, 이들의 늦은 퇴근 및 귀가로 발생하는 심야 교통비, 그리고 야근으로 생기는 각종 육체적·정신적 건강 문제를 생각한다면 식당 영업시간을 줄이자는 디아즈 장관의 주장은 일리가 없지 않아 보인다.   스페인 노동계는 노동시간을 현행 40시간에서 37.5시간으로 줄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장시간 일할수록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를 내세우면서 지난 수년간 스페인만의 특수한 노동 시간에 관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시에스타가 이런 노동시간 축소 논의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인식과 생활습관은 무섭다. 하루아침에 바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종의 문화가 되어버린 생활 관습을 대상으로 하는 논쟁은 예민한 측면이 있다. 스페인의 생산성 제고와 노동시간 단축 과제가 그들의 전통과 맞서며 어떤 변화를 이루어낼지 흥미롭다.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2024.04.02 00:47

  • [글로벌 아이] 재외 교민들의 투표지에 담긴 소망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우리나라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중국에 26년째 살고 있는 교민 박정수씨의 말이다. 네이멍구자치구 바오터우에 거주하는 그는 새벽부터 집을 나서 재외국민 투표소가 마련된 베이징 주중한국대사관을 찾았다. 바오터우는 베이징에서 600㎞ 넘게 떨어진 곳에 있다. 기차로 왕복 7시간, 투표 한 번에 꼬박 하루를 다 써야 하지만, 박씨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예전 같지 않아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며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왔다.   지난 27일 베이징 주중국 한국대사관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이도성 기자 다음 달 10일 열리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앞서 재외국민 투표가 시작됐다. 지난 27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엿새 동안 전 세계 115개 나라 220개 투표소에서 진행된다. 이번 재외선거 투표에 등록된 사람은 14만8000명 정도다. 지난 21대 국회의원 선거보다 14% 가까이 줄었다. 특히 중국에는 재외선거권자가 17만여 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투표를 위해 신고한 사람은 10% 정도에 그쳤다. 교민의 투표 편의를 위해 주중 대사관 측이 마련한 버스는 베이징과 톈진 곳곳을 돌고 투표소에 도착했지만 45개 좌석은 상당수 비어 있었다.   투표소를 찾는 발걸음이 줄어든 건 중국의 ‘제로 코로나’ 3년을 거치면서 전체적인 교민 수가 크게 줄어든 영향이 크다. 하지만, 계속 악화하는 한·중 관계와 정치권에 대한 불신에서 원인을 찾는 목소리도 있다. 베이징에서 근무 중인 한 주재원은 “낮은 투표율 자체가 의사 표시”라면서 “투표를 하지 않음으로 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은 희망을 그리고 있다. 중국에 유학 중인 대학생 오혜연 씨는 “지난 대선에 이어 두 번째 재외국민 투표”라면서 “투표를 하면서 우리나라와 내 지역에 대한 책임감이 더 올라간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버스로 3시간 30분 만에 투표소에 도착한 중국 교민 박인헌 씨도 “국민 한 사람으로 투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톈진에 20년 넘게 산 김 모 씨는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시선이 사드(THAAD) 사태 때보다 더 안 좋아졌다고 느낀다”며 “앞으로 나아졌으면 한다”며 투표했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이른바 ‘셰셰’ 발언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공방이 오간다. 대중 외교의 큰 틀을 논하면서도 ‘국민의 삶’은 빠져 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투표용지에 담아 전하는 마음은 과연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 것인가.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2024.03.29 00:19

  • [글로벌 아이] ‘부적절함’의 부적절함

    이영희 도쿄특파원 최근 일본 TBS에서 방송 중인 드라마 ‘부적절한 것도 정도가 있어!(不適切にもほどがある!)’를 흥미롭게 보고 있다.(한국 넷플릭스에서도 방영 중) 일본에서 이런 드라마가 나오다니, 라는 놀라움과 어쩌면 일본이라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라는 수긍이 오간다. 줄거리는 이렇다. 1986년, 도쿄의 한 중학교 체육선생님인 오가와가 어느 날 퇴근길 버스에서 잠깐 잠이 든다. 눈을 뜨니 38년 후인 2024년의 도쿄에 도착해 있다. 뭐지? 우동 가락 같은 것을 귀에 늘어뜨리고(아이팟), 네모난 철판(스마트폰)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버스에 가득하다.   일본 TBS에서 방송 중인 드라마 ‘부적절한 것도 정도가 있어!’ 포스터. [사진 TBS] 흔한 타임슬립물이지만, 드라마의 시도는 야심차다. 버스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학교에선 야구배트로 학생들을 체벌하며, 여성들에게 ‘못생긴 게’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퍼붓던 시대의 중년 남성은 요즘 세상에 여러 모로 ‘부적절한’ 존재다. 정치적 올바름(PC)이 지배하는 레이와(令和·2019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일본의 연호) 시대에 뚝 떨어진 주인공이 처음엔 쇼와(昭和·1926~1989년) 시대의 미덕을 항변하다 점차 나름의 해법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다.   작가는 믿고 보는 코미디의 대가 구도 간쿠로다. 하지만 코미디로 그리기엔 지나치게 고차원의 문제였달까. 하하 웃다가도 자꾸 거슬리는 부분이 눈에 띈다. 38년 전 중년 남성의 시선이 중심이다보니 직장에서의 파워하라(권력형 괴롭힘), 세크하라(성적 괴롭힘) 등의 사례가 죄다 ‘요즘 애들의 유난스러움’ 정도로 그려진다. “자 싸우지 말고 대화합시다”라는 아저씨의 중재에 모든 갈등이 해소된다는 설정 또한 너무 단순하다. 일본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평론가 스즈키 미노리는 아사히신문에 드라마가 여성 인권이나 성적 소수자를 묘사하는 방식 등을 지적하면서 “페미니즘이나 (현대의) 인권 감각을 야유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에서 일본의 성 평등 순위는 조사 대상 146개국 중 125위였다. 선진국이라기엔 턱없이 낮은 성 평등 지수가 보여주듯 ‘다른 목소리’를 경계하고 배제하는 분위기가 사회 곳곳에서 느껴지기도 한다. 드라마가 그려내는 일본 사회에 대해서도 더 활발한 논쟁이 있기를 바랐건만, 비판 의견엔 “불만 있으면 보지 마”라는 반응이 대다수다. 유사한 주제의 드라마가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면 계속 방송을 이어가는 게 가능했을지, 복잡한 마음으로 드라마의 완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영희 도쿄 특파원

    2024.03.26 00:27

  • [글로벌 아이] 식탁에 앉을 것인가, 메뉴에 오를 것인가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가 20일 서울에서 폐막했다. 배제된 중국은 관영 통신사를 통해 개최국 한국을 미국의 ‘졸(馬前卒)’에 비유했다. 한 신문은 사설에서 관뚜껑이 덮였다며 ‘개관논정(蓋棺論定)’에 이번 회의를 비유했다. 중국은 왜 이렇게 흥분했을까. 배경에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식탁·메뉴 발언이 자리한다.   “국제 시스템 안에서는 테이블에 없다면, 메뉴에 오르게 될 것이다.” 지난달 17일 뮌헨 안보회의에서 한 말이다. 독일·인도 외교장관과 함께한 세션에서 사회자는 “미·중의 긴장이 더 큰 분열로 이어지고 있고, 미·중이 동맹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며 미국의 입장을 물었다. 미국 외교 사령탑은 이때 작심하고 식탁·메뉴론을 꺼냈다.   지난달 17일 뮌헨 안보회의에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국제 질서의 ‘식탁·메뉴론’을 의미 심장하게 말했다. [AP=연합뉴스] 중국·북한·대만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미·중 경쟁이 새롭게 격투기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분석했다.   우선 중국. 관영 신화사가 영문 칼럼에서 블링컨을 소설·영화 속 식인범 ‘한니발 렉터’에 비유했다. “워싱턴이 무자비한 제로섬을 추구한다”고 했다. 환구시보가 이어 “중국어로 번역하면 ‘칼자루를 잡지 못하면 고기가 된다’는 뜻”이라며 “약육강식의 세계관에 오싹한 냉혹함과 한기가 배어 있다”는 비난 사설을 실었다. 북한의 반응은 좀 늦었다. 이달 1일 노동신문에 “미국이 더 이상 ‘식도락’을 누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맹비난 논평을 실었다.   대만 신문은 “미국의 전략과 지정학적 사고가 바뀌고, 미국 국력이 쇠퇴하면서 나온 발언”이라며 “트럼프 같은 고립주의 성향의 대통령 당선이 유력하다는 자체가 자유주의 가치외교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우려했다. 또 “식탁 아니면 메뉴는 적나라한 비유이지만 현실적”이라며 집권당에 경종을 울렸다.   최근 미국 의회는 틱톡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중국은 유튜브·페이스북 등을 금지하면서도 “조폭의 논리”라며 반발했다.   중국의 격한 반응에 조바심이 묻어난다. 중국은 지금도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와 휴전협상을 병행했던 마오쩌둥의 양수론(兩手論)에 충실하게 미국을 상대한다. 블링컨의 발언은 쇠퇴하는 미국이 더는 호락호락하게 페어플레이만 하지 않겠다는 경고다.   내년 백악관의 주인은 미·중 경쟁을 더욱 과격하게 몰고 갈 것이다. 바이든의 신(新)합종정책이 시즌 2를 맞을지, 트럼프의 신고립주의 폭풍이 몰아칠지는 알 수 없다. 두 시나리오별로 대응반이 가동돼야 한다. 여야 정치권은 총선 후부터라도 외치에 힘을 모으기 바란다. 나라를 메뉴판의 고기로 만들지 않으려면 말이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2024.03.22 00:20

  • [글로벌 아이] 트럼프의 ‘통합’이 걱정되는 이유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트럼프가 대선 후보 확정된 뒤 내놓을 첫 메시지는 ‘통합(Unity)’일 것이다.”   지난달 만난 워싱턴 인사가 귀띔해 준 이야기였다. 미 의회 관련 업무를 해 온 그는 바로 직전 플로리다에서 열린 공화당 ‘큰 손’ 기부자들의 비공개 모임인 ‘미국기회연대’ 행사에서 나온 발언들을 파악해 전해줬다. ‘통합’이란 메시지 전략을 설명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선거캠프 선임고문인 수지 와일스였다. 연장선상에서 부통령 후보로 트럼프 열성 지지층인 ‘마가(MAGA)’ 인사는 넣지 않겠다고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일 경선에서 압승을 거둔 뒤 연설에서 “우리는 통합을 원한다”고 말했다. [AP=연합뉴스] 이와 관련한 본지 보도 후, 지난 5일 ‘수퍼 화요일’에서 압승을 거둔 트럼프는 실제 연설에서 “우리는 통합을 원한다”고 말했다. 마뜩잖더라도 다른 공화당 지지층과 기부자를 흡수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연설 중 트럼프는 뜬금없이 ‘차이나 바이러스’ 이야기에 상당한 비중을 할애했다. 중국의 무능 탓에 우한 연구소에서 유출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물질 피해와 사망자를 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가 아니라) 차이나 바이러스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하다”라고도 했다.   물론 중국이 은폐하고 있는 부분은 언제라도 밝혀져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통합을 말하다 꺼내 든 ‘차이나 바이러스’ 이야기는 트럼프의 의도를 의심하게 했다. 그러면서 4년 전 불쾌했던 기억도 다시 소환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차이나 바이러스’ ‘쿵후 바이러스’를 입에 달고 다니며, 코로나19로 인한 미국의 막대한 피해가 자기 탓이 아님을 강조했다. 이에 자극된 일부 미국인들의 분노는 중국과 한국을 구분하지 못했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등 대도시에선 한국인을 향한 폭력이 잇따랐다. 그나마 양호했다던 워싱턴에서도 길을 걷다 이유 없이 욕을 듣기 일쑤였고, 식당이나 상점에서 위축되기도 했다. 지하철역 플랫폼에선 혹시 누가 밀칠까 봐 기둥 뒤로 붙어서게 됐다.   실제 UC샌프란시스코가 2020년 3월 트럼프의 ‘차이나 바이러스’ 발언 이후 130만 건의 트윗을 분석한 결과, ‘반아시아’ 정서를 키운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적으로 내부 통합을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은 흔한 수법이지만, 대개 희생양이 뒤따랐다.   국내서도 여러 각자의 이유로 트럼프의 귀환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트럼프가 말한 통합이 그 특유의 ‘편 가르기’에 의한 것이라면, 4년 전의 불쾌함도 함께 귀환할 가능성이 크다.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2024.03.19 00:26

  • [힘내라! 대한민국] 휴게 공간·팝업스토어 결합 ‘에픽 서울’ 오픈

    현대백화점   더현대 서울에 선보인 ‘에픽 서울(EPIC SEOUL)’이 남성 5인조 버츄얼 아이돌 ‘플레이브’ 팝업스토어로 꾸며져 있다. [사진 현대백화점] 현대백화점은 이달 1일 더현대 서울 5층에 약 730㎡ 규모로 고객 휴게 공간과 팝업스토어를 결합한 신개념 공간 ‘에픽 서울(EPIC SEOUL)’을 오픈했다.   ‘에픽 서울’이라는 명칭은 경험(Experience)·열정(Passion)·혁신(Innovation)·창의(Creativity) 등 이 공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를 표현한 ‘에픽(EPIC)’에 ‘서울’을 더해 더현대 서울의 정체성을 강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에픽 서울’을 활용해 새로운 쇼핑 경험을 극대화할 예정이다. 팝업 공간에서는 K팝 스타나 하이엔드 브랜드 등 글로벌 아이콘과 협업한 단독 콘텐트를 비롯해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몰입형 아트 전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사의 최신 개봉작 소개 등 다양한 팝업을 선보일 계획이다. ‘매출보다는 이색적 가치와 경험, 힐링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현대백화점만의 자체 기준을 충족하는 콘텐트만 선별한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남성 5인조 버츄얼 아이돌 ‘플레이브’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데뷔 1주년 기념 팝업(3월 1~17일)을 시작으로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와 함께 선보이는 ‘인사이드 아웃2’ 팝업존 등이 오는 6월까지 이어진다.     김승수 중앙일보M&P 기자 kim.seungsoo@joongang.co.kr

    2024.03.15 05:31

  • [글로벌 아이] 몰리는 일본 관광객, 엔저만은 아닌 까닭

    김현예 도쿄 특파원 도쿄를 찾은 관광객이라면 한 번씩은 가는 대표 명소, 아사쿠사(浅草)에선 요즘 새 여행이 뜨고 있다. 우리 말로 치자면 ‘뻥 관광’이다. 가이드가 아사쿠사 곳곳을 안내해주는 90분에 2800엔(약 2만5000원)짜리 여행 상품인데, 재밌는 건 자기소개부터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라는 거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교차로 앞에 서서 가이드가 말한다. “에도시대엔 모든 길이 아사쿠사로 이어져 87차로였어요. 올 때마다 길이 새롭게 만들어져서 헤매기 쉬워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당초 이 여행은 만우절을 겨냥해 만들어졌지만, 이 새빨간 거짓말 투어가 큰 웃음을 주면서 7월 예약까지 1100명이 줄을 섰다.   지난 2월 외국인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일본 아사쿠사. [EPA=연합뉴스] 일본 여행이 제대로 봄을 맞았다. 가는 곳마다 관광객이 넘쳐난다. 일본 정부 관광국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2500만명 넘는 해외 관광객이 일본을 찾았다. 올 1월에도 268만명이 왔는데, 이 추세라면 3100만명을 넘긴 코로나 이전 수준(2019년)으로 회복 가능하단 전망마저 나온다. 엔저라서 그렇다는데, 정말 그것뿐일까. 관광업계 관계자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관광산업은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하고, 가본 사람들에겐 다시 가고 싶다는 꿈을 파는 산업”인데 최근 일본의 관광 붐이 여기에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요즘 도쿄도청은 매일 밤 도쿄도청사를 영상으로 수놓고 있다. 세금 들어간 커다란 도청사를 관광자원으로 만들겠다는 취지다. 30년에 걸친 재개발 끝에 지난해 말 문을 연 아자부다이힐스는 도쿄의 새 명소로 입소문 나며 관광객을 흡입 중이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새 볼거리에 손님들이 밀려드는 것은 당연지사. ‘도쿄의 부엌’으로 불리는 츠키지(築地) 시장에선 일본산 최고급 소고기 스테이크 꼬치 하나에 5000엔(약 4만5000원)이나 하지만, 행복한 표정으로 지갑을 여는 외국인들을 손쉽게 볼 수 있다. 최근 도요스(豊洲)에 문을 연 관광지 센캬쿠반라이(千客万来)에선 사람들이 한 알에 600엔 하는 딸기를 선뜻 산다. 고토히메(古都姫)란 이름이 붙은 나라(奈良)현 딸기로 젊은 농업인이 지난 2021년 야심차게 만들어낸 신품종이다.   관광 공해란 볼멘소리도 나오지만, 관광객이 가져온 온기는 지방 소도시로 퍼지는 중이다. 유명 관광지마다 북새통을 이루다 보니 “관광객이 덜 찾는 곳을 가보자”는 사람들마저 늘어나 지방 경제에도 숨을 불어넣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있다. 이웃 나라 일본의 관광 흥행기를 그저 넋 놓고 바라봐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2024.03.15 00:18

  • [글로벌 아이] 여유로움과는 거리 먼 미국 서머타임 논쟁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지난 10일, 미국 애리조나 주와 하와이 주를 제외한 총 48개 주에서 한 시간이 사라졌다. 현지 시간 오전 1시 59분 59초가 지나면서 시계추는 오전 2시가 아닌 3시로 훌쩍 건너뛴(spring forward: 봄을 맞아 시간을 앞당긴다는 표현) 것이다. 다소 생소하게 들려도 1918년 일시적으로 도입된 이 일광절약시간(Daylight Saving Time)은 이후 1966년 미 연방 통일시간법 채택에 따라 현재까지 실시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서머타임(Summer Time)으로 알려진 이 제도는 미국 뿐 아니라 영국과 유럽연합(EU) 회원국·캐나다·호주 등 세계 70여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다. 미국은 3월 둘째 주 일요일에서 11월 첫째 주 일요일까지 8개월간 이어지고, 유럽은 3월 말에 시작해 7개월 뒤인 10월 말에 종료한다. 추위가 물러가 활동하기 좋은 계절에 태양광을 한 시간 ‘늘려’ 소비를 촉진하고 따뜻한 야외에서 저녁 시간을 즐기며 인공조명에 필요한 에너지를 절약하자는 취지다.   3월 10일(현지시간) 실시된 일광절약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SNS 안내. [ABCNews 인스타그램 캡처] 미국 인구 3억 2천만 명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따를 수밖에 없는 제도이다 보니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도입 후 수십 년 간 찬반 논쟁이 이어지자 미국 상원은 2022년 매년 두 차례나 시간을 조정하는 번거로움과 수면 시간 변화에 따른 건강 문제, 또 이에 따른 교통사고 유발 같은 위험 부담이 크다며 일광절약시간을 일 년 내내 시행하자는 햇빛보호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도 불구하고 기존 표준시간이 생체리듬에 더 적합하다는 의학계 의견과 일반 시민 반대가 만만치 않아 아직도 하원에서 계류 중이다.   연방의회 차원의 법 도입이 요원해지자 이제는 주별로 표준시간 또는 일광절약시간으로 통일하자는 움직임에 힘이 실리고 있다. 주 차원에서 연중 일광절약시간을 택할 경우 연방의회 승인이 필요하지만, 기존 표준시간을 택하면 연방 차원의 승인 없이 주법이 확정된다. 이럴 경우 현재도 4개의 각기 다른 표준시간대로 구별된 북미 대륙에 복잡한 주별 서머타임 도입 여부가 여러 혼선과 막중한 경제적 손실을 가져올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물론 좀 귀찮아도 수면시간 60분 사라지는 게 대수냐고 반문하는 이도 많다. 어차피 가을이 오면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되돌려(fall back: 가을에는 시간을 뒤로 늦추라는 표현) 따뜻한 이불 속에서 좀 더 잘 수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한편으론 ‘조삼모사’의 논쟁처럼 보이지만, 결정의 순간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 역시 분명해 보인다.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2024.03.12 00:20

  • [글로벌 아이] ‘왕’의 마지막 회견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중국에 있는 전 세계 언론사의 특파원들이 7일 이른 아침부터 베이징 미디어센터에 몰렸다. 입구부터 경계가 삼엄했다. 이름, 사진, 소속이 적힌 기자증을 일일이 확인하고서야 차량이 지날 수 있게 정문을 열어줬다. 건물로 들어설 땐 국제공항 출국장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엑스레이 검사대와 금속탐지기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색받았다. 이 과정을 통과해야 2층 회의실로 오를 수 있었다. 이날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기자회견이 열리는 곳이다.   지난 7일 중국 베이징미디어센터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 기자 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는 왕이 외교부장. 이도성 기자 기자회견은 오전 10시로 공지됐지만 자리 다툼이 치열했다. 약 3시간 전부터 취재진이 몰려 300석 넘게 마련한 좌석엔 빈 곳이 없었다. 100대에 가까운 방송 카메라가 연단을 비추고 있었다. 10시 정각이 되자 왕 부장이 등장했다. 수백 명의 눈동자가 한 곳을 향했다. 준비한 인사말을 마친 왕 부장은 1시간 30분 넘게 질의응답을 이어갔다. 내외신 기자 21명에게 질문받고 일일이 답했다. 특히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길은 북한의 합리적인 안보 우려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회견 종료 후에도 일부 기자들이 연단으로 달려가 질문을 쏟아냈다. 한 일본 기자는 “우리에겐 질문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음 질문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번이 외교부장으로서의 마지막 기자회견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953년생으로 올해 만 70세인 왕 부장은 앞서 10년 동안 외교부장 자리를 맡은 뒤 부총리급인 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으로 영전했다. 하지만 후임인 친강 전 외교부장이 면직되면서 지난해 7월부터 외교부장을 겸임하고 있다.   한 직급 아래인 외교부장을 겸한 건 임시방편이라는 분석이다. 후임 외교부장으로는 류젠차오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거론된다. 류 부장은 외교부 대변인 출신으로 주필리핀대사와 주인도네시아대사 등을 지냈다. ‘사드 배치’ 관련 논의가 본격화되던 2015년 3월엔 서울을 방문해 외교 협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앞서 왕 부장은 올해 신년 축사에서 한국 이야기를 쏙 빼놨다. 중국 외교정책 방향을 설명하면서 미국, 러시아, 일본 등을 차례로 언급했지만 한국은 거론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최근 소원해진 한·중 관계의 현주소다. 앞으로 중국 외교가 나아갈 변화의 방향에 관심이 쏠린다.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2024.03.08 00:22

  • [글로벌 아이] 덩그러니 놓인 미국의 투표함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사실상 미국 대선 후보를 결정할 5일 ‘수퍼 화요일’을 앞둔 지난달 말. 경선이 예정된 버지니아의 공공 도서관에서 낯선 기계를 발견했다. 1주일 뒤 선거 때 사용할 전자 투표함이었다.   투표함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방에 놓여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영어와 병기된 한글 ‘투표’라는 글씨였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니 그런가 했다. 그러고 나서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이게 여기에 이렇게 있어도 되는가?”   지난달 28일 버지니아 공공 도서관에 투표함이 놓여 있다. 한글로 적힌 ‘투표’ 표기가 눈에 띈다. 강태화 기자 관계자에게 물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원래 이렇게 해왔다”고 말했다. 폭력 사태로 번진 대선 불복 얘기를 꺼냈더니, “사람들이 지켜보는 이곳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당신 말고 아무도 투표함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지난 1월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때의 일이다. 허락을 구해 투표소 내부를 취재했지만, 투표함 접근은 거절됐다. 개표 결과 역시 참관인 발표 전까지는 촬영할 수 없었다. 선거 부정의 여지 때문이라고 했다. 유권자도 투표소를 확인하려면 시민권을 입증하는 정보를 입력해야 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투표소 위치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다. 투표소에는 투표함이 덩그러니 놓여있는데도 말이다.   서퍽대학교의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지지자의 52%는 올해 대선에서 선거 부정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공정할 거란 의견은 7%였다. 반대로 바이든 지지자들은 81%가 공정성을 신뢰했고, 불신한다는 응답은 3%에 그쳤다. 특히 지지 정당을 떠나 전체의 83%는 ‘민주주의가 걱정된다’고 답했다. 여기에 트럼프는 경선 직전인 지난 3일 버지니아 유세에서도 “조작하기에 너무 큰 투표율을 확보해야 한다”며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 자체에 대한 불신을 계속 부추겼다.   총선을 앞둔 한국의 상황도 만만치 않다. 이미 ‘소쿠리 투표’라는 막장을 보여준 선관위는 이번엔 수검표 과정을 추가했다. 정당 난립으로 비례대표 투표용지 길이도 21대 때의 48㎝를 넘어설 것으로 보여 이 역시 수개표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사전투표 용지 날인에 대해선 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다.   미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링컨 대통령은 “투표(ballot)는 총알(bullet)보다 강하다”고 했다. 그러나 신뢰하지 못하는 제도를 통해 이뤄진 투표와 그로 인해 창출된 권력은 강한 힘을 낼 수 없다. 특히 0.73%포인트로 당락이 결정되는 한국에서는 보다 더 정교하고 공정한 ‘게임의 룰’이 필요하다.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2024.03.05 00:38

  • [글로벌 아이] 캠프 데이비드 3국 회담 6개월 뒤 흘러나오는 ‘한국 소외론’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지난해 8월 18일 미국 대통령 휴양지 캠프 데이비드에 모인 한·미·일 3국 정상의 ‘케미’는 더없이 좋아 보였다. 노타이 차림의 세 정상이 나란히 오솔길을 걸으며 환하게 웃는 장면은 3국 동맹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미묘한 이상 징후가 감지된다. 시작은 지난 14일 일본 한 매체에서 보도된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3월 방한설이었다. 용산 대통령실은 곧바로 “추진한 바 없다”고 했다. 수위가 조절된 외교적 논평 대신 부인부터 한 것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줬다. 살짝 불쾌감이 묻어난 듯도 했다.   지난해 8월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을 마친 뒤 공동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왼쪽부터). [연합뉴스] 통상적이지 않은 일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날 밤 10시 넘어 한국과 쿠바의 수교 소식이 전격적으로 공개됐다. 그야말로 깜짝 발표였다. 우리 정부의 오랜 숙원이었고 물밑에서 들여온 각고의 노력이 맺은 결실임을 감안하면 예고도 없이 늦은 밤 갑자기 공개한 것은 뜻밖이었다. 정부는 미국에도 12시간 전에야 이를 알렸다고 한다.   다음날인 15일 한국·쿠바 수교와 관련해 미 국무부가 내놓은 논평도 상례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한민국의 주권적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다. ‘지지’나 ‘축하’는 없었다. 외교 용어에서 ‘주권적 결정을 존중한다’는 수사는 ①특별히 반대하지 않는다 ②환영하지 않는다 ③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셋 중 하나일 때가 많다.   미국이 쿠바와의 관계가 안 좋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 그렇더라도 미국이 일본의 대북 접촉 시도에는 힘을 확 실어주는 것과 비교하면 확연한 온도 차가 느껴진다. 기시다 총리 방북 추진설과 관련해 정 박 미 국무부 대북고위관리는 16일 “일본의 대화 노력을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대북 관계 개선 노력도, 그런 일본에 대한 미국의 지지도 이해는 간다. 지지율이 바닥인 기시다 총리는 정국 반전의 돌파구가 필요할 수 있고, 조 바이든 정부는 4월 방미를 앞둔 기시다 총리에게 줄 선물을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최근 ‘이례적’ ‘전격적’ ‘예상 밖’ 등의 표현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일련의 상황이 이어지는 것은 석연치 않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이러다 한국만 소외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미 대선 등을 계기로 북한이 미국·일본과 직거래를 해 한·미·일 공조에 균열을 내겠다는 계산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정부가 주변국 움직임을 면밀히 살필 때다. 외교·정보 채널을 총동원해 한·미·일 소통과 협력을 더욱 다져야 한다.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2024.03.01 00:25

  • [글로벌 아이] 나도 혹시 ‘소프트 꼰대’?

    이영희 도쿄특파원 예의와 친절함으로 무장한 일본인이지만, 가끔 새롭게 떠오르는 신조어를 보면 그 무자비함에 놀랄 때가 있다. 2000년대 중반 유행한 ‘마케이누(負け犬· ‘싸움에 진 개’라는 뜻으로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없는 30대 여성을 일컫는 말)가 그랬고 요즘에는 ‘노해(老害·일본어로 ‘로가이’)’다. 말 그대로 ‘늙음의 해악’이란 뜻. 인터넷에선 ‘자신의 늙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주변 젊은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 또는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특징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자신의 의견만 밀어붙인다’ 등이 있으니 한국어 ‘꼰대’와도 비슷한데, 꼰대라는 말에 담긴 약간의 해학(?)조차 찾아보기 힘든 가차없음이 느껴진다.   일본에 ‘소프트 꼰대’ 논쟁을 불러온 책 『일을 그만두는 방법(仕事のやめ方)』 표지. [사진 아마존재팬] 최근엔 ‘소프트 노해’, 즉 ‘소프트 꼰대’라는 단어가 퍼지고 있다. 일본의 유명 방송작가인 스즈키 오사무가 최근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된 책 『일을 그만두는 방법(仕事のやめ方)』에 처음 등장한 말이다. 저자는 책에서 자신이 30년 넘게 해온 방송 작가 일을 완전히 그만두겠다고 선언하면서 그 이유 중 하나로 스스로 ‘소프트 꼰대’가 됐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가 말하는 소프트 꼰대는 주로 40대 이상에서 출몰하며, 회사의 부장 등 중간관리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장을 떠났지만 여전히 본인의 감각이 뛰어나다고 믿고 있고, 스스로를 합리적인 상사로 인식한다.   ‘소프트 꼰대력’이 주로 발동되는 것은 윗사람에게서 지시받은 업무를 젊은 직원들에게 전달할 때다. 후배들이 “말이 안 된다”며 항의해도 “하기 싫은 마음은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후배들을 설득한다. 결국 위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했으면서도 직원들에겐 “나는 너희들 편”이라고 어필하거나 “나 때는 더 심했다”는 식으로 호소한다. 표현은 ‘소프트’하지만 결국 젊은 직원들의 사기를 꺾어버리는 ‘노해’로 귀결된다.   저자는 자신이 회의 시간에 무심코 내놓은 의견 때문에 오랜 기간 고민한 아이템을 접어야 했다는 후배의 ‘폭로’를 듣고 이를 깨달았다고 한다. 소셜미디어(SNS)에선 ‘뜨끔하다’는 얘기부터 ‘어리다고 더 나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까지 다양한 논쟁이 펼쳐지는 중이다.   여기까지 읽고 ‘혹시 나도?’ 의심이 든다면 저자의 조언을 마음에 새길 법하다. 소프트 꼰대가 되지 않기는 무척 어렵다. 단, 자신을 늘 부감(俯瞰·높은 곳에서 내려다봄)으로 관찰하며 객관화하는 습관을 갖자.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면 스스로 서 있는 자리가 달라졌음을 인정하자. ‘미움을 받으려면 제대로 미움받자’는 것이다. 이영희 도쿄 특파원

    2024.02.27 00:18

  • [글로벌 아이] 중국 경제 광명론과 장벽론, 그리고 흑백지양론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지난 4일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CBS 인터뷰에서 중국 경제를 말했다.   “중국 경제는 현재 몇 가지 도전에 직면했다. 성장은 둔화했다. 그들은 시장 주도 성장 모델에서 벗어났다. 국영 기업이 더 주도하는 모델이다. 부동산 투자에 지나치게 연루됐다. 상업용 부동산에 문제가 있다.”   답변은 미·중관계로 이어졌다. “미국은 중국과 경제적 관계가 중요하지만 대부분은 중국에서 만든 제품을 구매할 뿐이다. 미국의 금융 시스템은 중국과 깊게 얽혀있지 않다. 미국 경제와 생산 시스템도 중국 경제 시스템과 깊이 얽혀있지 않다. 중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심각한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미국에 끼칠 영향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이다.”   10일 중화총상회(SCCCI) 단배식에 참석한 타르만 샨무가라트람(왼쪽 세번째) 싱가포르 대통령. [SCCCI 페이스북 캡처] 지난 8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 경제 광명론을 펼쳤다. 춘절 단배식 연설에서 “전 세계를 보면 풍경은 이쪽만 홀로 좋다(風景這邊獨好)”고 했다.   중국 경제 낙관론자였던 스티븐 로치 예일대 교수가 반박했다. 지난 13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홍콩의 영광은 끝났다”는 칼럼을 싣고 “중국 경제가 벽에 부딪혔다”고 했다. 중국 경제 장벽론이다.   싱가포르는 실리론을 펼쳤다. 지난 10일 중화총상회 단배식에 참석한 타르만 샨무가라트람 대통령 연설에서다.   “미국·중국·세계가 동시에 다층적 불확실성에 직면했다. 불확실성이 기회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계란은 나눠 담아야 하고 일방적인 베팅은 피해야 한다. 아시아의 주요 경제체는 자주 흑백 논리로 비친다. 비관적이든 낙관적이든 해설가들에 의해 꾸며지고 증폭된다. 진실의 한 면만 본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세계 주요 신문에 매일 중국의 부정적인 전망만 실린다. 중국이 직면한 도전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부동산 시장, 지방 정부의 과도한 부채, 소비 심리의 위축, 연금과 사회보장제도의 부족 등 도전을 겪고 있다. 중국이 근본적인 강점을 가졌다는 점도 논쟁할 필요가 없다. 더는 값싼 노동력에 의존하지 않을 제조업 생태계를 갖췄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인프라 및 물류 시스템과 함께 경쟁력 있는 수출 경제를 만들었다. 중국의 취약성 혹은 강점에만 초점을 맞춘 대담한 화술은 전체 그림을 놓친다. 흑백 관점을 지양하고 중국·인도·동남아, 미국과 유럽까지 포함해 예측불가능한 환경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   파월·시진핑·로치·샨무가라트람의 중국 경제 광명론과 장벽론, 흑백지양론이 충돌한다. 여론전쟁이 숨기려는 사실에 주목할 때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2024.02.23 00:24

  • [글로벌 아이] 미 대선 전에 한미관계 ‘못박기’?…“트럼프 잘 모르고 하는 일”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트럼프를 참 모르고들 하는 일이다.”   한국 정부가 방위비 분담금을 놓고 미국과 조기 협상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지난 트럼프 정부에서 일했던 고위 인사가 한 이야기다.   올 초부터 국내 언론에선 한·미가 12차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체결을 위한 협상에 조기 착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난 2019년 주한 미군 오산 공군기지를 찾았던 트럼프 전 대통령. [AP=연합뉴스] 2026년부터 적용되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내년부터 협상을 시작하면 됐다. 이례적으로 시기를 앞당긴 것은 다분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가능성에 대비해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주한미군 철수 카드까지 흔들며,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5배까지 올려 불렀다.   그러니 한국 정부 입장에선 지금의 분담금 수준을 못 박아두기 위한 발 빠른 조처라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고위 인사는 “쓸데없이 트럼프의 관심만 끌 어설픈 수”라고 평가했다.   ‘해외로 줄줄 새는 납세자 돈을 이제 미국을 위해 쓰겠다’는 구호는 트럼프 지지층 ‘마가(MAGA)’들이 가장 환호하는 지점 중 하나다.   트럼프가 러시아 침공 장려까지 운을 띄우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에 돈 더 내라고 협박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런 와중에 한·미 간 방위비 분담금이 예년 수준으로 미리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어떨까. 트럼프의 시선은 단숨에 나토에서 주한미군으로 옮겨갈 게 분명하다. 바이든 정부의 실기를 찾느라 혈안이 돼 있던 그에게 선거 기간 내내 공격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방위비 협정은 법적 구속력을 가진 조약(Treaty)이 아닌, 협정(Agreement)이다. 이론적으로 어느 한쪽이 일방 파기하려 해도 막기 힘들다. 따라서 서둘러 끝낸 방위비 협정은 트럼프 재집권 시 우선적으로 ‘전 정권 흔적 지우기’ 대상이 될 가능성도 크다.   우리 정부가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의 성과물인 핵협의그룹(NCG)의 후속 단계를 문서화하려고 서두르는 것도 트럼프에겐 같은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 트럼프 2기라는 불확실성에 맞서 뭐라도 하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눈에 안 띄게 할 자신이 없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미 대선이 본선 레이스에 들어갔을 때, 혹시라도 트럼프 입에서 “거봐라. 나라면 받아냈을 수십억 달러를 부자 나라 한국이 바이든에게서 떼어먹었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조기에 못 박아 놨다며 좋아하던 분담금 협정은 악몽이 될 수 있다.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2024.02.20 00:24

  • [글로벌 아이] 나라님도 못 한 것

    김현예 도쿄 특파원 일본 도쿄 긴자 한구석에 신경 쓰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칠 법한 자리에 가게 하나가 있다. 올해로 4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곳으로 주인도 일본인, 직원들도 모두 일본인인 이 가게에선 ‘고려병(餠)’이란 이름의 떡을 판다. 녹차와 곁들여 먹는데, 시루떡 형태로 묘한 그리움마저 불러일으킨다. 호기심이 동해 이리저리 검색하다 가고시마현 과자공업조합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가고시마의 유명 과자 소개를 발견했다. 가고시마의 고려병에 대한 것으로 고려병 옆에 ‘고레모치’란 음을 달았다. ‘에도시대에 한국 고려에서 끌려온 도공들이 고향을 그리며 신사를 세우고 제를 지낼 때 찹쌀과 팥앙금으로 쪄낸 과자. 맛이 좋아 서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지난 9일 주일 한국 문화원에서 한국떡 연구가 노하라 유미씨가 최근 출간한 『쌀가루로 만드는 한국 떡 간식 』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서설이 길었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이 고려 떡을 떠올리게 된 건 순전히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최근 한국 떡에 대한 책을 출간하게 된 노하라 유미(野原由美·46)다. 달콤한 팥앙금이 많이 든 일본 떡을 파는 가게엔 늘 손님이 북적이는데, 그런 일본에서 한국 떡 책을 낸다고? 일본과 오랜 인연이 있지만 그간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던 한국 떡이 책으로도 나온다니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설 연휴가 시작되던 지난 9일 주일 한국문화원에서 그를 만났다. 자리에 앉자 가방에서 통을 하나 꺼낸다. 갓 쪄온 시루떡이 고운 자태로 담겨있다. “제가 한국 떡을 만들기 시작한 지 13년 됐으니까 이 떡은 사람으로 치면 중학생의 맛이겠죠? 고등학생의 맛, 어른의 맛으로 올려 나갈 거예요.”   바리스타로 일하던 지난 2009년 도쿄에서 우연히 ‘하얀 증기가 올라오는 찜기가 있는 가게’에 들어간 것이 인연의 시작. 이곳에서 호박설기를 처음 맛본 뒤 지금껏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소박한 맛에 반해 그길로 감자떡에 바람떡까지 한국 떡에 빠졌다. 틈이 나면 한국을 찾아 지방을 돌며 특유의 떡을 맛보는 떡 여행도 시작했다. 떡이 좋아 한글을 배웠고, 그 덕에 한국에 대한 애정마저 깊어졌다. 이젠 학생들에게 한국 떡을 가르치는 전도사 역할도 자처하고 있다. “한국 떡은 행복을 상징하는 것 같아요. 서로 나눠 먹는 행복이요. 한국인들은 이사나 결혼식, 생일에도 떡을 먹잖아요? 두 나라의 과거는 바뀌지 않겠지만, 서로 떡을 나눠 먹으며 사이 좋게(友好) 지내면 좋겠어요.”   한 나라의 무언가를 선입견 없이 좋아하게 되는 것에서 시작해 그 나라를 알게 되고, 더 나아가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 드라마나 노래 뿐만이 아닌, 일본에서 마주치는 ‘한국 문화’로 통칭되는 소소한 우리의 것들은 나라님도 그 어떤 정치인이나 권력집단도 못해낸 위대한 일들을 지금도 이뤄내고 있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2024.02.16 00:36

  • [글로벌 아이] 스위프트 귀국 일정까지 챙기는 일본의 ‘감성’ 외교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외교에서 ‘죽창가’ 같은 감정(感情)은 금기된 요소다. ‘한끗 차’지만,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있다. 바로 감성(感性)이다. 총성 없는 전쟁에 비유되는 외교에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감성도 빠질 수 없다. 외교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2일 주미 일본 대사관이 배포한 성명서가 화제가 됐다. 내용은 이랬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도쿄를 출발해 수퍼볼 경기장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할 수(Speak Now) 있다. 스위프트가 빨간(Red) 옷을 입고 응원할테니 걱정하지 않도록(Fearless) 확인해주고 싶었다”. ‘Speak Now(3집)’, ‘Red(4집)’, ‘Fearless(2집)’는 스위프트의 앨범 타이틀이다.   지난해 5월 캠프 데이비드 회담. 바이든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총리가 어깨에 손을 얹고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왜 가수의 경기 관람까지 정부가 보증을 섰을까. 이번 경기엔 스위프트의 연인 트래비스 켈시가 뛰었다. 켈시가 우승컵을 들어 올린 뒤 청혼할 수 있다는 극적 장치까지 마련됐다. 그런데 일본 때문에 세기의 드라마가 결방됐다면? 일단 일본의 ‘보증서’는 큰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켈시는 종료 10초를 남기고 돌파에 성공했고, 연장 승부 끝에 극적인 우승 드라마가 완성됐다.   이것만 해도 성공한 작전이다. 그러나 일본의 의도는 이게 끝일 리가 없다. 외교 소식통은 “일본이 기가 막힌 그림을 그렸다”며 “이례적 행동에는 당연히 목적이 있고, 이번엔 4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의 국빈 방미를 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다. 그러나 순방과 통화의 순서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이 앞서왔다. 그런데 바이든 대통령은 첫 아시아 순방 때 한국을 먼저 찾았다. 국빈으로 먼저 초청된 사람도 윤석열 대통령이었다. 쿼드(Quad) 멤버인 인도와 호주 정상이 윤 대통령에 이어 초청됐지만, 기시다 총리는 아직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소식통은 “일본이 트럼프에 반대했던 스위프트를 내세운 것은 바이든용 메시지”라고 했다. 그는 “아소 다로(麻生太郞) 자민당 부총재의 트럼프 면담 시도로 오해가 생겼다”며 “감성을 내세운 일본의 보증으로 드라마가 완성됐고, 이후 스위프트가 바이든이 원하는 대로 지지 선언까지 해준다면 이번 보증서는 일본의 요구를 관철할 묘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기시다 총리가 4월 방미 때 자위권 확대를 요구할 거란 관측이 나온다. 경우에 따라 중국은 물론 한국의 여론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공교롭게 두 사람의 만남은 총선일인 4월 10일로 예정돼 있다.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2024.02.13 0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