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두리 "분데스리가 즐겁지 않다면…" 폭탄발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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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

독일 뒤셀도르프 밤거리에는 레몬빛 가스등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1826년 독일에 가스등을 전한 영국에는 전등이 발명된 뒤 가스등이 1000개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뒤셀도르프에는 가스등이 1만7000개나 된다. 이 가스등처럼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색광을 내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축구 선수가 있다. 올 시즌 스코틀랜드 셀틱을 떠나 뒤셀도르프로 이적한 차두리(32)다. 가벼운 부상으로 2주 부상자 명단에 오른 차두리는 22일(한국시간) 현지를 찾은 기자에게 소중한 시간을 내줬다.

 뒤셀도르프는 차두리가 2002년 레버쿠젠에 입단한 후 일곱 번째로 뛰는 분데스리가 팀이다. 차두리는 “대학 2학년 때 아버지(차범근 SBS 해설위원)의 팀 동료 아들이 1860뮌헨 소속으로 15분 뛰었다고 자랑하는데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랬던 내가 10년 가까이 독일에서 뛰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고 말했다.

 차두리는 뒤셀도르프에서 6년 만에 포지션을 측면 미드필더로 재변경했다. 차두리는 7경기에 출전해 공격 본능을 뽐내고 있다. 지난달 SF바움베르크와 연습경기에서 4골을 터트렸다. 독일 언론은 ‘차두리가 가속을 시작했다(He is on the gas)’고 보도했다. 하지만 차두리는 “난 오른쪽 수비수로 뛰고 싶다. 감독님이 1부 리그 승격을 이뤄낸 포백을 중용하고 있다. 다시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차두리는 “분데스리가는 뛰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곳이었지만 지금은 예전보다는 무뎌진 게 사실이다. 축구가 100% 즐겁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올 시즌이 끝난 뒤에도 그만둘 것 같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하지만 ‘아우토반’ 차두리를 멈출 수 없도록 하는 게 있다고 했다. 태극마크다.

 두 차례 월드컵에 출전한 차두리는 지난해 말 최강희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뒤 대표팀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다. 한국 대표팀은 우측 풀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2014년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고전하고 있다. 차두리는 “내가 대표팀에서 은퇴한 줄 아는 분이 많다. 난 은퇴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며 “난 2002년 월드컵 때 스타가 됐고,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바닥을 찍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때 재발탁돼 태극마크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내 포지션에 월등히 잘하는 후배가 나오면 깨끗이 양보하겠다. 그게 아니라면 나도 똑같이 기회를 받고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차두리는 “내 축구 인생을 경기에 비유하면 후반 40분 3-5로 지고 있다. 지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내 축구인생이 승리로 끝난다는 건 아버지를 이기는 거다”며 “월드컵 4강(2002)과 원정 16강(2010)에 힘을 보탰으니 그래도 3골은 넣은 것 같다. 팬들은 3-5로 지다가 혼신을 다해 4-5를 만들면 져도 박수를 쳐준다. 만약 브라질월드컵 16강행에 일조할 수 있다면 4-5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뒤셀도르프(독일)=박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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