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이제부터라도 대선다운 대선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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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안철수 무소속 후보가 전격적으로 사퇴했다. 여론조사 단일화 협상이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닥치자 자신이 물러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로써 투표를 25일 앞두고 야권 단일후보는 문재인 민주당 후보로 정해졌다. 모든 과정이 다른 나라에선 볼 수 없는 비정상이다. 하지만 어쨌든 단일화 안개가 걷힌 건 다행이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이제 대선은 박근혜-문재인 정책대결로 갈 수 있게 됐다.

 안철수의 사퇴는 혼란과 비상식의 클라이맥스다. 지난해 가을 서울시장 출마 포기 이래 그는 근 1년 동안 대통령 출마를 놓고 불투명한 행보를 보였다. 직업은 대학교수지만 그는 사실상 출마에 대비한 정치활동을 벌였다. 그는 정권교체를 지지하면서도 민주당 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속히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지도 않았다. 한국 사회에는 오랫동안 ‘안철수 혼란’이란 미스터리 드라마가 상영됐다.

 9월 19일 그가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혼란은 더 심해졌다. 그는 출마 때부터 정치혁신과 국민동의라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며 단일화의 길을 열어놓았다. ‘출마 안개’는 ‘단일화 안개’로 바뀌었다. 단일화라는 블랙홀이 정책이슈를 빨아들이면서 대선은 사상 최대의 기괴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야권이 준결승 상태이니 박근혜 후보가 참여하는 TV토론도 불가능했다.

 정책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그는 정책팀을 급조했고 정책팀은 공약을 급조했다. 그는 새 정치를 주창했으나 내놓은 정치개혁안은 문재인 후보조차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단일화 압력에 쫓기자 그는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정치, 경제·복지, 외교·안보 세 분야에서 문 후보와 정책 단일화를 이루겠다고 공약했다. 단일화가 되면 기존의 문·안 정책은 상당 부분 달라질 참이었다. 그러니 여야 정책 비교검증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었다. 정책의 비교분석이 이렇게 물리적으로 부실했던 선거는 유례가 없을 것이다.

 안 후보는 새 정치를 주창했으나 선거운동과 협상 과정에서 구정치에 갇혔다. 문 후보는 57년 전통 제1 야당이 13차례 지역경선을 통해 선출한 정통 후보다. 안철수는 무소속이다. 무소속이라면 도전자 입장에서 작은 어려움을 감수하고 큰 승부를 거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구정치 스타일의 룰 싸움을 고집했다. ‘야권 단일후보로 누구를 지지하느냐’ 정도의 여론조사 문항이라면 그는 당당히 수용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그는 오차범위 내에 불과한 2~3%의 우위를 더 얻어보려고 끝까지 아옹다옹했다.

 그는 ‘새 정치 개척자’다운 도덕성과 현실적인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경력의 많은 부분은 ‘헌 세상’을 걸어온 많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 정치 프로그램도 신선한 것이 없었다. 그는 정권교체를 위한 대의를 위해 양보하는 것이라 했다. 역사의 소명을 위해 몸을 던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선거운동과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구태는 그런 명분을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안철수는 한국 사회의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다. 그는 성실했고, 노력했다.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같은 미지의 길을 개척했고 ‘청춘 콘서트’를 통해 젊은 세대와 소통했다. 지난해 가을부터 그는 정치혁신을 주창했고 누워 있던 정치권은 벌떡 일어났다. 그의 사퇴와 상관없이 정치개혁은 상당히 진전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자산과 정치적 자산은 다르다. 정치 지도자가 되려면 구호를 뛰어넘는 경력·지식·비전 그리고 세력이 있어야 한다. 안철수는 이런 도약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내일부터 후보등록이 시작되고 대선은 본질로 향하게 됐다. 늦었지만 TV토론과 유세, 정책발표를 통해 후보들은 국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 향후 5년엔 많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저성장이라는 새롭고 위험한 환경, 양극화라는 고질병, 그리고 한반도 정세변화라는 미지의 위협이 버티고 있다. 후보나 유권자나 ‘안철수 안개’ 속에서 잃어버렸던 국가의 길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