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가판'에 울고 웃는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3일 오후 5시 30분.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사옥앞으로 오토바이 몇 대가 신문을 가득싣고 들어오면서 이곳은 신문을 나르는 손길로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가판이 도착하면 신문배달원과 수 십명의 기업체 홍보담당자들이 뒤섞이면서 조용하던 저녁거리가 갑자기 활기를 띈다.

◇ 기업체 홍보담당자들 '우리에게 가판을 달라'

이곳은 신문사들이 아침 배달판 신문을 인쇄하기 전에 찍은 초판신문의 총집결지. '내일의 신문'을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정보의 메카'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각 기업체 홍보담당자들은 회사 관련 기사가 어떻게 나왔는지, 또 광고는 잘 나왔는지 보기 위해 매일 저녁 광화문으로 출근(?)을 시도한다.(사진=도착한 가판을 배달원들이 분류하고 있다. 동아일보 사옥밖 풍경)

오후 6시 30경,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신문들이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100여명이 몰려들어 신문을 받아들고 신문보기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동아일보 1층 로비는 이미 신문을 보는 사람들로 만원.

광화문 사거리는 동아일보 사옥내에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이 길거리에 신문을 깔고 앉아 신문을 보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형광펜을 들고 줄을 그어가며 신문을 보는가 하면 칼로 신중히 신문을 오려내기도 한다.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기사내용을 열심히 보고하는 사람도 눈에 띈다.

1년정도 가판을 보고 있다는 LG 증권 홍보실의 김지원씨는 "처음 가판을 보러 나왔을 때는 거리에서 신문을 보고 전화로 보고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참 희한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기가 막히더군요. 하지만 이젠 저도 그 장면속의 한 등장인물이 되어 남들 이목 생각안하고 신문지 깔고, 철퍼덕 주저앉아 열심히 신문을 봅니다."라며 지난 날을 회고했다.

(사진=동아일보 사옥밖에서 신문을 칼로 오려가며 보고 있는 홍보담당자)

제일제당 홍보실의 정하명 대리는 이곳에서 만난 다른 홍보담당자들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아는 사람하고 인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판이 나오면 너무 바뻐요. 기사 체크하다보면 정보교환은 고사하고 대화 나눌 시간도 없는걸요. 가판을 훑고 나면 사무실로 직행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어울릴 수도 없죠."라고 말했다.

LG 캐피탈 홍보실에서 2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는 영상홍보 전문업체 '캐파'의 박주범씨는 "가판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는 경우도 보았다"면서 "홍보담당자들에겐 큰 화제가 되버린 이 사건(?) 이후로 홍보실 일부 여직원들은 가판에 나가가 전에 반드시 화장을 고치더군요"라며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신사옥이 완공되기 전에는 광화문 지하도에서 가판을 봤다는 어느 중견 홍보담당자는 "그래도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도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광화문 지하도로 총출동한다는 홍보담당자들. 심지어 남들 쉬는 일요일에도 가판을 보러 나와야 한다고.(사진=동아일보 사옥 안팎에서 가판을 보고 있는 홍보담당자들)

◇ 가판 전문카페도 등장

마지막 신문 가판이 배달되고 나면 이제 배달원들의 손길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종합일간지와 경제지,스포츠지등 7000부 가량이 가판을 기다리는 기업체나 관공서, 언론사 등으로 향한다. 속보성이 생명인 가판의 특성때문인지 신문을 가득 실은 오토바이는 마치 곡예를 하듯 바삐 시야에서 사라진다.

광화문 사거리가 매일 저녁 이렇게 붐비다 보니 가판을 배달해 실내에서 볼 수 있는 '가판 카페'도 등장했다.

세종문화회관 뒷편에 위치한 '채플린'이란 이름의 카페에는 동아일보사 앞의 분주한 풍경과는 달리 조용한 음악과 시원한 음료를 즐기며 가판을 보는 복받은(?) 홍보담당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가판이 나오기 전인 오후 5시 이전에는 일반 카페영업도 했지만 이제는 복사기와 팩시밀리를 갖추고 가판만을 보는 전문카페로 탈바꿈한 이곳은 한 홍보전문업체가 운영하고 있다.

가판 카페의 최용주 대표는 "비오는 날 광화문 지하도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한 후배가 안쓰러워 이 카페를 시작했다"면서 "이제는 각 기업체 홍보실을 대신해 신문을 보는 업무도 대행하고 있다"고 했다.

'가판보러 나오는 것이 통지표를 받으러 가는 심정'이라는 홍보담당자들. 회사에 대해 직접 언급한 기사가 나왔을 때, 특히 기업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 있는 안좋은 기사가 나왔을 때 가장 바빠진다는 이들은, 가판을 보러 나오는 실제적인 이유가 자사에 불리한 기사를 최대한 빨리 확인하고 대처하기 위해서라고 귀뜸한다.

불리한 기사가 나오면 기사를 작성한 기자와 직접 접촉해 기사수정을 시도하기도 하고 인맥을 동원해 읍소하거나, 혹은 자사 광고를 중단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모든 방법을 총동원한다고.

매일 저녁 5시 30분 나오는 가판. 그 가판에 따라 울고 웃는 각 기업체의 수많은 홍보담당자들이 오늘 저녁에도 광화문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룰 것이다.

홍승한 사이버리포터<hsh48@joins.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