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인촌 형제, 기업·금융 함께 경영한 첫 근대적 부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97호 26면

경성방직에서 만든 태극성표 광목의 광고 포스터. 경성방직은 당시 국내 공장으로서는 최대 규모였다. [중앙포토]

『삼천리』 1930년 11월호의 조선 대재벌 총해부(一)란 기사를 쓴 류광렬(柳光烈)은 ‘김성수(金性洙:1891~1955년) 계열의 자본금이 500만원’이라면서 “조선에서 자못 근대식으로 사업을 벌인 재산가(財産家)가 있다면 누구든지 인촌(仁村) 김성수씨를 첫손에 꼽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김성수와 민영휘는 공통점과 다른 점을 고루 가진 부호였다. 삼천리 1931년 2월호의 조선 최대 재벌 해부(3)에서 김을한(金乙漢)은 조선의 갑부를 민영휘, 김성수 순으로 꼽으면서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 ③김성수·김연수 형제

“제1의 민영휘씨는 지나간 시대의 유물인 양반계급에서 태어난 덕택으로 세도바람에 치부를 한 권세가요, 제2의 김성수씨는 조선의 보고인 전라도 출생으로 비록 세도는 하지 못했을망정 리식(利殖)과 경리에 눈이 밝은 호농(豪農)의 후예로 태어난 까닭에 누(累)백만의 재산을 세습한 행운아요.(삼천리 1931년 2월호)”

김성수는 1891년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인 김경중(金暻中)의 4남으로 태어났다. 김성수는 세 살 때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로 출계했지만 부모 품을 멀리 떠난 것은 아니어서 생가와 양가는 솟을대문이 경계 역할을 하는 정도였다. 김기중·경중 형제의 부친 김요협(金堯莢)은 장남 김기중에게 1000석 농토를 주고 김경중에게는 200석 농토만을 주었다고 전하는데 경중의 재산증식 수완이 뛰어나서 1918년에는 형의 750정보보다 훨씬 많은 1300정보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 두 형제 농토의 수확은 연 2만 석 이상이 되어 호남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다.

김성수 생가, 전북 고창군 부안면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김기중·경중 형제는 고향에 학교를 세우고 김경중은 조선사(朝鮮史) 17권을 출간하는 등 사회와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런 성향이 여타 지주들과는 다른 점이었고, 이는 김성수에게도 유전됐다.

일본 유학 후 25세에 중앙학교 인수
김성수는 만 열두 살 때 자신보다 다섯 살 위인 고정주(高鼎柱)의 딸 광석(光錫)과 혼인했다. 조선 중기 성리학자 고경명(高敬命)의 후예였던 고정주는 고향인 담양군 창평에 창흥의숙과 영학숙(英學塾)을 설립했다. 김성수는 여기에서 평생지기인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년)를 만났다. 둘은 함께 일본유학 길에 올라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등을 거쳐 1910년 와세다(早稻田) 대학에 입학했다. 송진우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탈하자 일시 귀국했지만 김성수는 남아서 학업을 계속했다. 1914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김성수는 이듬해 불과 스물다섯의 나이로 중앙학교를 인수하는데 류광렬은 그 내막을 신파조로 묘사하고 있다.

“수성(守成)이 먼저인 부형이 거만(巨萬)의 대금(大金)을 던져서 불생산적(不生産的) 학교를 경영하는데 누가 즐겁게 허락하리요. 이에 김성수씨는 며칠 조르다 못해서 최후적으로 신명(身命)을 걸고 대명(待命)하였다. 빈방에 문을 첩첩(疊疊)히 닫고 며칠을 굶으며 자살할 뜻을 보였다….(삼천리 1930년 11월호)”

이렇게 부모 돈을 타내서 인수한 학교가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성수는 와세다대 졸업 1년 전인 1913년 양부와 생부를 모두 일본으로 초청해 와세다대를 구경시키면서 교육사업에 뜻이 있음을 시사했다고도 전한다. 양부 김기중도 부안군 줄포(茁浦)에 영신학교를 설립했던 인물이므로 김성수의 교육사업 구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성수는 교육사업과 ‘동아일보’라는 언론사업에도 투자했기 때문에 민영휘와 달리 사회의 세평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자연스레 학교·언론을 경영하는 민족 기업가처럼 비쳤다.

그는 이런 이미지를 굳히는 한편 경성방적 등을 통해 근대적 자본주의 경영에 나섰다. 민영휘가 소작료에 의존하는 봉건 부호로 인식된 반면 김성수가 근대적 사업가로 인식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광수는 동광(東光) 1931년 9월호에 20개월의 구미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김성수에 대해 인물월단(人物月旦), 김성수론(論)이란 글을 썼다.

이 글에서 이광수는 “김성수를 말하면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연상하고 경성방적주식회사를 연상하고 또 동아일보사를 연상할 것이다. 아마 해동은행(海東銀行)도 연상하고 중앙상공주식회사(中央商工株式會社)도 연상할 것이다”라고 김성수의 사업체들을 열거하면서 “이 모든 그가 관계하는 사업을 총칭하야 ‘김성수 콘체른’이라고까지 칭하는 이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독점자본, 기업결합 등을 뜻하는 콘체른(Konzern)은 재벌과 비슷한 의미인데 이광수는 “김성수가 이 모든 사업에 중심인물의 지위를 가진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는 기업과 금융을 동시에 소유한 최초의 사업가였다. 1931년 자본금 300만원의 해동은행은 민영휘 소유의 동일은행(400만원)에 이어 두 번째 규모였다. 김성수의 경영스타일도 화제였다. 이광수는 앞의 글에서 김성수는 “한번 사람을 신용해서 무슨 일을 맡긴 후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고 그에게 일임한다. 중앙고보의 인사행정은 중앙고보의 교장에게 일임하고, 경성방적은 전무 이강헌(李康賢)에게, 동아일보는 말할 것도 없이 사장 송진우의 전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아일보 초대 주필 장덕수(張德秀) 가족에게는 8년 동안 미국 유학비를 대주었다”고도 전하고 있다.

김성수의 기업경영은 그의 동생 김연수(金秊洙)와 떼어놓고선 생각하기 쉽지 않다. 삼천리 1932년 3월호는 유명인사 삼형제 행진곡이란 글을 싣고 있는데, 여기에 민영휘의 민형식·대식·규식 세 아들과 김성수·김연수·김재수(金在洙) 삼형제 이야기도 싣고 있다. 이때만 해도 김연수에 대한 세평이 나쁘지는 않아서 “김연수씨는 교토제대(京都帝大) 경제학과 출신이다. 그는 학력도 상당하려니와 치밀한 두뇌는 이재(理財)에 밝아 내형(乃兄:그의 형)이 경영하는 각 사업에 대한 기업방침은 대부분 그의 머리에서 나온다고 하며 현재 해동은행 전무로 있어서 재계에 상당한 명망이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동아일보 경영 민족주의자 평가 받아
사회사업은 김성수, 영리사업은 김연수 식으로 정리되었다는 투인데, 류광렬은 형제 사이의 우애에 대해서도 좋게 평가하고 있다. “내형(乃兄) 성수씨가 양가로 출계(出系)해서 전 재산을 사회사업에 소비하자 그(김연수)는 뒤로 다니며 수습에 힘쓰고 자가 재산도 대부분을 쓸어 넣되 일찍이 그 형에 대하야 원언(怨言:원망하는 말)이 없고 무슨 사업이든지 형을 앞세우고 자기는 뒤로 서서 모든 공로와 명망은 형에게 돌린다 하니 또한 미덕이라 아니 할 수 없다…김연수가 폐병으로 중태에 빠지자 김성수가 밤낮으로 통곡하면서 ‘동생이 불행하면 자기 사업도 다 보는 날이라(삼천리 1932년 3월호)’고 비통해 했다”고 말했다.

김성수의 ‘동아일보’는 이광수와 함께 일제에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주창하다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으로부터 불매운동을 당하기도 했지만 일제 치하에서 한국어 신문 경영은 그 자체로 민족주의자란 인상을 주었다.

김성수 형제에게 만주국 수립은 도약의 기회였다. 소설가 박계주는 삼천리 1940년 5월호에서 김연수에 대해 ‘만주국 경성(京城: 서울) 주재 총영사이자 경성방직 사장, 폐쇄 위기에 빠졌던 심양(봉천)의 동광중학교를 50만원을 주고 매입한 교육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때 경성방직의 1년 총생산액은 2200만원이나 되는데, 박계주가 내지인(일본인) 경영 회사와의 경쟁관계에 대해 묻자 김영수는 “지나사변(1937년 중국침략) 이전에는 혹 있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사변 이후부터는 원료 부족으로 피차 곤경 중에 있으니까 시장 쟁탈전이 있으려야 있을 수도 없다”고 답하고 있다.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김연수는 심양(봉천)과 석가장(石家莊)에 방적회사를 세우는데, 심양의 남만(南滿)방적회사의 건설비만 800만원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성수 형제의 사업에 만주국 수립과 1937년의 중일전쟁은 큰 호재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미국 학자 카터 에커트(Eckert)는 경성방직을 일제의 보호와 지원으로 성장한 ‘일제의 아이(Offspring of Empire)’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만주국과 중일전쟁은 새 시장이 열렸다는 기업경영 측면에서는 호재였지만 김성수가 이후에도 민족주의자란 이미지를 유지하기는 어렵게 만들었다. 군국주의가 강화되면서 일제는 민족개량주의마저도 강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김성수는 일제의 강요로 친일단체 가담과 학병 권유 연설도 해야 했다. 김연수는 친일단체 가담, 학병 권유 연설, 비행기 헌납 등으로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는 수모를 당했다. 김성수는 해방 후 줄곧 자의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는데 물론 자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 대륙침략에 따른 경제적 수혜를 일부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