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예산 심의에서 대선 입김 차단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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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내년도 예산안 심의 과정에 대선 바람이 거세다. 여야가 각 당의 대선후보가 내놓은 공약을 뒷받침할 재원을 내년 예산에 반영하기 위해 혈안인가 하면, ‘차기 대통령 몫의 전용예산’을 별도로 편성해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왔다. 다음 달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년 예산안을 가급적 자기 당 후보에게 유리하게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정당이 정강정책에 따라 예산 편성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거니와 국민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특정 후보의 공약을 뒷받침하기 위한 예산을 별도로 확보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나라살림의 근간인 국가예산을 특정 후보의 선거운동에 활용하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예산이 이렇게 선거운동의 수단으로 전락할 경우 예산 편성 자체가 포퓰리즘에 휘둘려 재원 배분의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아직 당선도 되지 않은 특정 후보의 공약을 예산에 미리 반영하라는 것은 국민의 선택권을 모독하는 처사다. 예산 편성에 대선 선거운동의 입김을 가급적 배제해야 하는 이유다.

 차기 대통령의 정책의지를 반영하기 위해 용도를 지정하지 않은 별도 예산을 책정하자는 것은 더더구나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민주통합당 최재성 의원은 “내년 정부예산안(342조원)의 1% 수준인 3조~4조원을 예산안 심사 때 따로 떼어 새 대통령을 위해 총량으로 남겨놓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세부 지출항목을 명시하도록 한 예산법을 무시하는 것임은 물론 나랏돈을 대통령의 쌈짓돈으로 여기는 초법적·제왕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예산 편성을 두고 이 같은 논란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신임 대통령의 첫해 예산이 전임 대통령의 임기 말에 짜일 수밖에 없는 ‘임기 불일치 현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예산안을 정부가 제출하기는 하지만 최종 예산은 국회의 심의를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임기 불일치’가 큰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만일 새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가 여소야대의 상황이라면 어차피 대통령의 공약대로 예산이 짜여지기 어렵고, 여대야소의 경우엔 대통령이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자신의 공약을 관철시킬 수 있다. 국민으로부터 아직 아무런 권한이 위임되지 않은 대선후보의 자격으로 차기 정부의 예산 편성에 간여하는 것은 월권이자 위법이다. 더구나 차기 대통령 몫으로 ‘백지수표’ 예산을 달라는 것은 국회의 예산심의권과 국민의 선택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국회는 대선 기간이란 이유로 예산편성 과정에서 특정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정치적 입김을 불어넣으려는 일체의 시도를 중단하기 바란다. 대신 나라살림을 최대한 알뜰하게 꾸린다는 예산심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불요불급한 세출예산을 절감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라살림이 정치바람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