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물텀벙이 벨루테, 막걸리 셔벗… 처음 접하는 맛, 참 오묘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8면

돌미역 살사 드레싱과 오솔레 굴

바닷가 마을 토속음식이 ‘파인 다이닝’으로 재탄생했다. 지난달 22일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에 차린 만찬상에서다. 음식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이탈리아 음식점 ‘부티크 블루밍’의 김성운(35·사진) 셰프가 준비했다. 태안 출신인 김 셰프는 자신이 어렸을 때 먹었던 태안의 전통 음식을 현대인의 감각과 입맛에 맞춰 12가지 코스 요리로 변신시켰다.

이날 행사는 천리포수목원에서 후원자들을 초청해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였다. 행사의 기획을 맡은 안면도문화학교 손현주(47) 대표는 “모두 배고팠던 시절에도 태안에선 ‘보리밥은 먹어도 반찬은 좋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진미를 즐기는 문화가 있었다”면서 “태안의 청정 식재료를 활용, 그 이야기를 끌어냈다”고 설명했다.

식전 빵부터 색달랐다. 태안 신진항에서 갓 잡아 올린 오징어와 안면도 ‘안면송’을 활용한 ‘오징어 먹물 빵과 솔잎 향을 넣은 포카치아·그리시니’. 바짝 말린 솔잎을 곱게 간 뒤 빵 반죽에 집어넣어 만들었다. 빵 한입에 조선시대 ‘왕실의 나무’였던 안면송의 향이 퍼졌다.

2 광어구이와 게국지. 3 차에 곁들여 먹는 다과. 태안산 연근·당근·생강 등으로 만들었다. 4 암꽃게 스파게티니. 5 초록 그물 위에 올려 낸 까나리와 망둑어.

전채요리로 나온 ‘천리포 까나리와 망둑어’는 추억을 불러오는 음식이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태안에선 사시사철 해산물이 흔했다. 천리포·영목항 등에서 많이 잡히는 까나리와 망둑어는 덕장에 그물을 쳐 두고 그 위에서 말렸다. 말린 뒤 조리거나 쪄서 밥반찬으로 먹을 요량이었겠지만, 말리는 중간중간 하나씩 집어먹는 재미도 쏠쏠했을 터다. 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그물이 동원됐다. 말린 생선 아래 초록색 그물을 깔아 이날 식탁에 올렸다.

수프는 ‘물텀벙이 김칫국’을 모티브 삼아 만든 ‘청어알을 곁들인 물텀벙이 벨루테(상아색을 띤 걸쭉한 소스)’였다. “물텀벙이, 옛날엔 정말 쌌어요. 대하나 꽃게 잡을 때 그물에 같이 걸려들면 버리기도 했을 정도였죠. 김칫국 끓일 때 넣으면, 흐물흐물한 물텀벙이 살이 국물에 흩어져 국물 맛이 정말 끝내줬어요.” 김 셰프의 말이다. 이제 물텀벙이는 귀한 생선이 됐다고 한다. 한 마리에 4만원씩 주고 사온 물텀벙이는 벨루테에도 감칠맛을 더해줬다.

광어구이와 같은 접시에 올라온 ‘게국지’는 태안의 늦가을 전통음식 게국지를 재해석한 요리다. 게장 국물과 갈배추·늙은 호박 등을 함께 버무린 다음 사나흘 뒤 끓이는 게 전통 방식이지만, 김 셰프는 리코타치즈·바지락·오징어 등을 찐 김치로 싸서 만들었다. 또 전통 게국지 국물을 졸여 소스로 활용했다.

이 밖에도 ‘토판염에 구운 대하구이’ ‘암꽃게 로제 소스 스파게티니’ ‘막걸리 셔벗’ 등 태안의 문화를 담은 음식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논 옆길에 막걸리 통을 세워 두면 막걸리 차가 와서 술을 부어 놓고 갔어요. 아침마다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막걸리를 채워줬던 차였죠. 3대째 양조장을 하는 ‘소원막걸리’가 달착지근해서 인기였어요. 셔벗으로 만드니 시원해서 더 좋네요….“

셰프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저녁 한 상에 담아낸 건 음식만이 아니었다.

글=이지영 기자
사진=민희기 사진작가, 천리포수목원 제공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