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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외톨이야, 개인형 퇴직연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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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 “아이(I) 알(R), 뭐? 퇴직연금 계좌? 하여튼 지점에 가면 된다고?” 회사원 김모(41)씨는 최근 증권사에 다니는 대학 동창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가 다니는 증권사에 개인형 퇴직연금(IRP) 계좌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용어였지만 동창이 “최소 다섯 개의 계좌를 유치하라는 할당이 떨어졌다”고 사정하는 바람에 계좌를 열기로 마음먹었다. 친구가 시킨 대로 인사부서에 ‘퇴직연금 가입확인서’를 떼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담당자는 “그게 뭐냐”고 되물었다. 이 담당자는 여러 곳에 확인한 다음에야 확인서를 떼줬다. 증권사 창구를 찾아가 IRP 계좌를 만드는 데 30분은 족히 걸렸다. 김씨가 “이 계좌가 뭐하는 거냐”고 묻자 창구 직원은 “나중에 퇴직금을 받는 계좌인데 일단 퇴직금을 이리로 보냈다가 바로 찾아 쓰면 된다”고 답했다.

 #자산운용사에서 일하는 남모(42)씨는 최근 친인척과 이웃 등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 수십 개의 IRP 계좌를 만들었다. 업무상 고객회사인 보험사와 은행 관계자가 저마다 ‘회사에 계좌 확장 캠페인이 시작됐다’며 부탁해 그들을 대신해 계좌 확장에 나섰다. 남씨는 “주변 사람에게 가입해 달라고 사정하는데 대부분 IRP가 뭔지 몰라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말했다.

 개인형 퇴직연금(Individual Retirement Pension·IRP)이 지난 2일로 도입 100일을 맞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비자는 IRP에 대해 관심도, 아는 것도 없다. 금융사만 계좌 유치에 분주할 뿐이다. 사실상 금융사 ‘그들만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IRP는 퇴직(연)금을 받을 근로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하는 계좌다. 정부는 7월 26일 개정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을 시행해 IRP 가입을 의무화했다. 국민연금과 함께 개인 노후소득의 한 층을 맡는 퇴직연금의 안전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기존에 개인적으로 가입하던 IRA(개인퇴직계좌)는 IRP로 통합됐다. 예전처럼 퇴직금을 한꺼번에 찾아갈 수는 있지만 그걸 좀 번거롭게 하자는 게 IRP의 골자다. 직장을 떠날 때 받는 퇴직금은 의무적으로 먼저 개인의 IRP로 입금된다. 그 다음에 원하는 사람은 이 계좌를 해지해 일시금으로 수령할 수 있다. 이전에는 퇴직할 때 우선 일시금으로 퇴직금을 받은 다음 연금으로 받기를 원하는 사람만 이미 받은 돈을 다시 개인퇴직계좌(IRA)에 적립했다. 일단 저금통에 들어간 돈은 잘 빼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IRP라는 ‘귀찮은’ 관문을 거치게 한 것이다.

 김동엽 미래에셋 은퇴교육센터 본부장은 “사용자가 원하면 바꿀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정해진 대로 선택하게 하는 일종의 ‘디폴트 옵션’을 바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퇴직금을 한꺼번에 써버리지 않고, 노후를 대비한 재원으로 남겨두는 사람이 늘게 하자는 취지다. ‘당근’으로는 ▶운용기간 중 발생한 이자(배당)소득 비과세에 따른 과세이연 효과 ▶연 1200만원 한도 추가납입 가능 ▶연간 400만원(연금저축 합산) 소득공제 혜택 등이 부여됐다.

 IRP를 의무화하는 법이 시행된 이후 금융사는 일제히 계좌 확대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퇴직금을 받을 사람이면 누구나 최소 1계좌가 있어야 하고, 훗날 그 계좌로 반드시 한 번은 ‘뭉칫돈’이 들어오게 되므로 금융사 입장에서는 큰 시장이다.

 2005년 도입된 퇴직연금 적립액은 매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올 8월 기준 400만 명이 가입했고, 쌓인 돈은 54조9000억원에 이른다. 더구나 IRP 계좌는 여러 곳의 금융사에 중복해 만들 수 있다. 그 때문에 금융사는 ‘선점하고 보자’는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인다. 수수료를 낮추거나 경품을 주고, 직원에게 계좌유치 할당도 한다. 특히 기존 IRA 시장에서 은행·보험사에 밀린 증권사가 적극적이다. 미래에셋·삼성·신한·우리 등 다섯 개 증권사가 지난달 말까지 새로 유치한 IRP 계좌 수는 5만6000개에 이른다.

 하지만 정작 가입 당사자인 직장인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우선 대부분은 IRP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현직에 있는 직장인에게 퇴직금 받는 것은 먼 훗날 이야기이므로 관심이 없다. 또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IRP가 기존의 노후대비 상품인 개인연금·연금보험에 비해 이렇다 할 혜택이 없다. 이렇다 보니 관련 지식 없이 친척이나 친구에게 떠밀려 가입하고 있다.

 지난달 말 기자가 은행과 증권사 창구를 한 곳씩 찾아 IRP 계좌를 만들며 ‘금융사 직원의 부탁을 받은 사람 외에 IRP에 가입하러 온 경우가 있느냐’고 물었다. 창구 직원은 모두 “아직 한 명도 없었다”고 답했다. 계좌를 트고도 뭔지 모르는 가입자도 많다. 금융사가 계좌 수 불리기를 목적으로 마구 가입시키면서 투자자 교육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결과다. 새로 유치했다는 계좌 중 잔고가 하나도 없는 이른바 ‘공계좌’도 상당수로 추정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 청을 받은 부서 담당자가 명단을 들고 와 한꺼번에 계좌를 만드는 등 비정상적인 가입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IRP는 활용하기에 따라 장점이 있는 제도라고 전문가는 말한다. 똑같이 소득공제 혜택이 있는 개인연금이나 연금보험은 ‘상품’이지만 IRP는 ‘계좌’다. 금융시장 환경 변화에 맞춰 자산을 굴릴 수 있다. 권용수 삼성증권 팀장은 “가입자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IRP는 분명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권 팀장은 “금융사는 투자자 교육에 힘을 쏟아야 하고, 정책적으로도 IRP 추가 혜택이나 대국민 홍보 등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인형 퇴직연금(IRP) Q&A

Q : 어느 금융사의 개인형 퇴직연금에 가입할지 내가 고를 수 있나?

A : 그렇다. 은행·증권·보험 등 퇴직연금 사업자인 금융회사 어디서나 마음대로 개인형 퇴직연금에 가입할 수 있다.

Q: 퇴직할 때까지 금융회사를 정하지 않으면?

A: 기존 퇴직연금을 담당하던 금융회사가 개인형 퇴직연금 계좌를 만든다. 즉 내 퇴직연금이 ‘○○생명보험’에 가입돼 있다면, ○○생명보험에 IRP 계좌가 개설된다.

Q: 금융사는 어떤 기준으로 골라야 할까?

A: IRP는 내가 모든 투자 결정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금융사를 신중히 골라야 한다. 선택의 폭이 넓은 다양한 금융상품을 갖췄는지, 투자 교육 프로그램이 잘돼 있는지, 자산관리 컨설팅을 해줄 수 있는 곳인지 등을 따져보는 게 좋다.

Q: 갑자기 목돈이 필요할 때, 찾아 쓸 수 있을까?

A: IRP는 일정 조건을 갖출 경우 중도 인출을 할 수 있다. IRP는 퇴직연금 제도의 일부이므로 퇴직연금 중도 인출 요건과 같다. 가입자 또는 부양가족이 질병·부상 등을 이유로 요양을 필요로 할 경우 필요한 자금을 인출할 수 있다. 무주택자가 자기 명의로 주택을 살 때, 파산선고를 받았을 때, 천재지변 등도 사유가 된다. 퇴직연금에서 적립된 금액 외에 개인이 IRP 계좌에 불입한 자금은 55세 이전이라도 해지할 수 있다.

Q: 내가 가입한 IRP의 수익률이 좋지 않다면?

A: 과세 이연 혜택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른 금융사로 계약을 옮길 수 있다.

Q: IRP 계좌에 자금을 더 넣을 수 있나?

A: 개인연금저축과 마찬가지로 연간 1200만원까지 불입할 수 있다. 연금저축 불입금과 합산해 연 400만원까지 납입한 금액에 대해 소득공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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