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야드’도 사라질 운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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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호 29면

추리물이나 스릴러물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스코틀랜드 야드’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를 비롯해 80일간의 세계일주 등 19~20세기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온갖 작품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스코틀랜드와 아무 상관이 없다. 런던 메트로폴리탄 경찰청, 즉 수도경찰청을 가리키는 별명이다. 원래 19세기 런던 중심부 관청가인 화이트홀 플레이스 4번지에 있었다. 그런데 이 건물의 후문은 그레이트 스코틀랜드 야드라는 이름의 거리로 이어졌다. 정문이 관리들의 차지였다면 후문은 민원인 통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야드에 간다’는 말로 수도경찰청을 방문한다는 말을 대신했다. 청사 정면 거리에 붙은 화이트홀은 그때나 지금이나 관청가의 대명사로 통해 이를 경찰청사의 별명으로 쓰긴 곤란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스코틀랜드 야드는 수도경찰청, 또는 그 청사와 동의어가 됐다. 월스트리트가 뉴욕 금융계를, 시티가 런던 금융계를, 여의도가 한국 금융계를 각각 가리키는 말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런던 수도경찰청은 1890년 스코틀랜드 야드란 지명과 상관없는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새 청사에 ‘뉴스코틀랜드 야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의 런던 수도경찰청은 1967년 시 중심부 빅토리아 지역에 새로 자리 잡았는데 뉴스코틀랜드 야드라는 간판까지 커다랗게 달아 명물이 됐다. 따지고 보면 스코틀랜드 야드라는 이름은 공식적으론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그 후신에 ‘뉴’스코틀랜드 야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는 영국과 런던의 재미난 ‘스토리’ 중 하나다.

하지만 앞으로 이 이름은 재정위기로 인한 긴축정책의 상징으로 바뀔 예정이다. 경찰 수뇌부가 매년 650만 파운드(약 114억원)의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뉴스코틀랜드 야드를 매각하고 작고 후미진 곳으로 옮길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범인이나 잘 잡고 범죄를 예방하면 되지 시내 중심부의 넓고 유서 깊고 값비싼 건물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이에 앞서 데이비드 캐머런 내각은 과감한 긴축정책을 발표하면서 내년 경찰 예산을 올해 36억 파운드(약 6조3200억원)에서 5억 파운드(약 8720억원) 절감하기로 했다. 이 청사는 현재 유지 경비가 연 1100만 파운드(약 193억원)나 드는 데다 최근 수리비 견적이 5000만 파운드(약 87억원)나 나오는 바람에 경찰 수뇌부가 고민에 빠졌다.

경찰 노조는 뉴스코틀랜드 야드 청사를 떠나는 것은 “왕관의 보석을 잃는 것과 같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경찰 수뇌부는 감원까지 해야 하는 판국에 전 세계에서 가장 부동산값이 비싼 지역의 하나인 런던 중심지에 본부를 유지하는 건 ‘사치’라고 주장했다.

유서 깊은 전통도 긴축이란 폭풍 앞에선 조각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번 사태는 잘 보여준다. 전 유럽을 흔든 재정위기 속에서도 영국이 비교적 잘 버텨온 것도 이렇게 미리, 과감하게, 꾸준히 경비를 줄이며 대비해 온 덕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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