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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지배구조 개선 펀드 경제민주화의 파수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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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호 20면

서울 소공동 미도파 본점의 1990년 전경. 98년 부도 이후 2002년 롯데그룹에 인수됐다. 미도파는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경영 효율화를 이뤄내지 못해 결국 부도를 낸 사례로 볼 수 있다. [중앙포토]

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가 화두지만 필자 입장에선 경제민주화 하면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 개선을 떠올린다. 나 같은 펀드매니저들은 소중한 고객 자산을 모아 좋은 기업에 투자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좀 딱딱한 표현으로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Fiduciary Duty)’라고나 할까.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 주주 가치를 제고하는 가장 효율적인 경제활동이다. 나아가 사회구성원 전체의 부(富)를 증대시키는 효과도 있다. 이게 바로 경제민주화의 핵심 메시지 아닐까.

증시 고수에게 듣는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하나씩 짚어 보자. 투자자가 특정 기업의 주식을 매수할 때는 경영권을 행사하는 기업주·총수·오너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오너가 경영을 잘해 주가가 오를 거라 기대하고 주식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오너 역시 펀드매니저처럼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가 있다. 지난 6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 43개 대기업 집단의 총수 일가 지분율은 4월 현재 4.17%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들 43개 대기업집단이 국내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게 크다. 무슨 말이냐 하면 소액주주를 비롯한 수많은 투자자가 대기업 오너의 지분이 적은 데도 불구하고 경영능력을 기대하고 주식을 산다는 것이다. 그만큼 오너의 선량한 관리자 의무는 크다.

지배구조 낙후, 외환위기 원인 중 하나
근래 상장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이 우리 사회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자본시장의 역사가 긴 미국 등 선진국은 이미 1980~90년대 경험한 일이다. 선진국 사례를 볼 때 기업지배구조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기업 경영의 방향이 주주 가치 증대와 일치하느냐 여부로 점수를 줘야 한다. 필자가 투자한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에 관심이 많은 것은 주주 가치 증대와 관련이 깊다. 2000년대 들어 선진시장에서 중요성이 커진 사회책임투자(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SRI)의 일환이기도 하다.

내가 지배구조 개선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97년 외환위기 직전의 한 사건이었다. 당시 국내 대표적인 유통 기업이었던 미도파에 대한 외국 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가 있었다. 이 시도는 결과적으로 무산됐다. 대주주인 대농그룹이 서둘러 사모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발행하고, 재계가 미도파 사모 BW를 인수해 준 덕분이었다. 적대적 M&A는 주식시장에선 호재로 통한다. 그해 1월 2일 1994억원이었던 미도파의 시가총액은 3월 5일 5266억원으로 무려 2.6배로 급등했다. 하지만 적대적 M&A가 무산된 뒤 4월 2일에는 1378억원으로 급감했다. 기업 가치가 연초보다 74% 떨어진 것이다.

이 사건은 보는 입장에 따라 평가가 다르다. 대주주나 재계 입장에서는 경영권 상실을 모면해 다행스러웠을지 모르나 소액주주 입장에서는 꼭 그렇다고 볼 수 없다. 미도파는 결국 이듬해 3월 부도가 났다. 만약 적대적 M&A가 성사되고 공격 측에서 주장했듯이 미도파가 지배구조를 개선해 경영 효율화를 이뤄 냈다면 어땠을까. 되레 소액주주 등 이해관계자들에게 이익이 됐을지 모른다.

또 다른 가정을 해 보자. 그때 우리나라에 지배구조개선펀드가 있었고, 그 펀드가 미도파에 투자하고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미도파의 기업 가치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사모 BW 발행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그 사건 이후 우리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또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의 100% 개방은 물론 채권시장·부동산시장까지 개방하게 됐다. 당시 한 외국계 증권사의 리서치센터장이던 나는 미도파 사례를 되새길 때마다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나라가 ‘경제 신탁통치’를 받게 된 배경에는 상장기업의 낙후된 지배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고 판단했다. 주식시장은 희소한 경제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기능을 한다. 상장업체의 지배구조가 낙후됐다면 이런 기능이 작동하기 힘들다.

필자가 2004년 지배구조개선펀드를 국내에 처음 만들었다. 펀드 이름이 다소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가장 기본에 충실한 투자철학이나 다름없다. 바로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다. 펀드에 돈을 댄 투자자들을 대신해 상장기업 경영자를 감시한다. 사익을 추구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주 전체의 대변자 역할을 자임한다. 주주를 위한 경영을 촉진하는 데 관여(engagement)하고, 나아가 그 기업에 유리한 것이 무엇인지 모색한다. 이는 주가수익률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미국의 권위 있는 재무 학술지인 ‘금융저널(Journal of Finance)’에 따르면 지배구조개선 활동이 시작된 직후 20일간 주가는 그런 일이 없을 때보다 평균 5~7% 높은 것으로 추정됐다.
 
무리한 투자 막을 견제장치 필요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는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개선 여지가 많다. 우선 대기업 오너의 등기이사 등재 비율이 낮다. 적잖은 오너가 권한은 유지하면서 책임은 회피하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고 투자자들로부터 비판받는 까닭이다. 가령 등기이사가 아닌 기업 오너가 무리한 투자를 감행하다가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그의 실질적 행사 권한보다 훨씬 적게 책임을 질 것이다. 오너의 이해관계와 주주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오너가 주주 입장에서 판단했다면 무리한 투자를 쉽사리 추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부실 투자가 이뤄진 것은 주주 입장을 반영하는 감시의 눈초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를 해야 한다면 바로 이 부분이 시급하다.

지배구조개선펀드는 자본시장의 기업경영 감시자다. 기업을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다. 과감한 투자는 어느 정도 리스크가 불가피하다. 어디까지나 경영집단에 대해 ‘신뢰할 만한 위협(Credible threat)’을 줘야 한다. 투자자들이 공감하는 범위 안에서 기업의 잘못된 의사 결정을 바로잡도록 촉구하자는 뜻이다. 한국의 지배구조개선펀드가 더욱 발전해 아시아권에서 신뢰할 만한 위협이 되는 게 내 꿈이다. 그 꿈이 커갈수록 한국 기업들의 대외경쟁력이 단단해질 거라고 믿는다.
 



이원일(53) 대신증권 애널리스트, 미국계 살로먼스 미스바니 리서치센터장를 거쳤다. 독일계 알리안츠 자산운용의 최고투자책임자(CIO) 시절인 2004년 국내 첫 지배구조개선펀드 ‘알리안츠 기업가치향상펀드’를 출시했다. 2005년 대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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