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플레이트] 故 김명성 감독의 명복을 빌며...

중앙일보

입력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라운드의 신사’였던 故 김명성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7월 24일 새벽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故 김명성 감독은 ‘김교수’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다도(茶道)를 즐기며 클래식음악과 동양화에도 상당한 조예가 깊었던 운동선수 출신의 몇 안 되는 지성인이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故 김명성 감독과는 약간의 인연이 있기에 더욱 그의 죽음이 서글프고 눈물이 흐른다.

’98년 그가 김용희 당시 롯데 자이언츠 감독의 성적부진에 의한 중도하차로 감독대행이 된 직후 그와의 전화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정식감독으로 승격이 된 당해 10월 10일에 서울 고속버스터미날 근처에 위치한 팔레스 호텔 커피숍에서 장장 3시간이 넘는 인터뷰로 안면을 트게 되었다.

다소 듣기 싫은 폐부를 찌르는 질문에도 편안하고도 친절하게 그러면서 자세하게 응해주는 그에게 빠져 들었다. 담배를 상당히 좋아해 인터뷰 내내 담배를 피던 그였다. 지금도 당시의 포근한 인상에 호탕한 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

필자와 나이 차가 워낙 많이 나 그의 활약상을 자세하게 몰랐기에 그에게 말해 달라고 하자 쑥스러워 하던 모습도 떠오른다.

故 김명성 감독은 부민초등학교 4학년 때 그의 형이 야구를 하는 것을 보고 야구에 관심을 가져 입문했다고 밝혔다.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야구의 명문 경남중학교에 스카우트 되어 갔고 경남고에 갈 수 있었으나 청운의 꿈을 안고 부산공고에 입학했다.

부산공고 시절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떨쳤다. 고교2학년 이었던 ‘63년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부산고와의 결승전에서 투수 겸 중심타자로 결승타를 치는 등 맹활약 하여 최우수선수상을 탔고 다음해인 ‘64년엔 역시 청룡기에서 0.393의 타율로 타격상까지 수상할 정도로 투·타에서 정상에 올랐었다.

‘65년 동아대를 중퇴하고 한국전력에 입사하여 실업무대에 뛰어 들었고 '68년 육군에 들어가 전국 실업야구대회에서 당해 최우수선수를 수상하였고 ,’69년 방어율 1위, ‘70년 다승1위을 차지하는 빼어난 피칭을 보였다.

제대 후 한국전력에 복귀하여 ‘71년엔 제9회 아시아 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박영길, 황성록, 이재우씨와 함께 우승을 이끈 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하였다.

‘76년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82년 롯데 자이언츠의 창단 투수코치로 시작해 ’86년과 ‘87년 지금은 없어진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에서 ,’89과 ‘90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94에서 ‘96년 LG 트윈스에서 투수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한 그는 ‘97년 가을 투수코치로 고향팀인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을 했다.

또한 ’84년과 ’85년 KBS 라디오에서 야구해설가로 ’97년 일간스포츠에서 칼럼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다. 야구에 대한 열정은 아마에 까지 펼쳐 ’97년 고려대학교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를 맡아 당시 김선우(보스턴 레드삭스)와 손인호(상무)를 키워 냈다.

정식감독으로 데뷔한 ’99년부터 故 김명성 감독은 몇 년 동안 꼴찌를 도맡아 했던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을 변혁시켜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하는 성적을 올렸고, 지난해에도 포스트시즌 진출시켜 롯데 자이언츠 관계자는 물론이고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몇 안 되는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인정 받았다.

이러한 결과로 그는 작년 11월 구단과 3억6000만원에 2년 재계약으로 이어졌다.

故 김명성 감독은 필자와 인터뷰를 할 때 자신은 책임감을 가지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며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감독이 되겠다고 다짐했으며 또한 '삶이란 이익과 동기에서 출발한다’는 한비자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감독으로서의 역량 역시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그러나 성적부진으로 인해 그렇게 중요시 여겼던 책임감이 그의 몸과 마음을 억눌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봐진다.

나이가 한참 어린 필자에게 야구장에서 만날 때 마다 깍듯한 존댓말과 함께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하던 그의 모습은 결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왠일인지 아직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 필자의 ’98년도 다이어리 속에는 그와의 인터뷰를 하면서 빽빽하게 채워진 메모가 있다. 그 것을 보고 있노라니 그의 호탕한 웃음과 포근한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故 김명성 감독님..고이 잠드시고 다음 세상에는 님이 바라는 꿈을 이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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