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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꽃피운 무등산 해맞이 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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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새해 첫날인 1일 오전 6시 광주시 무등산 중머리재(해발 5백89m).나무가 전혀 없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바람이 더욱 매섭다.

발을 동동 구르는 한무리의 등산객,일어서기를 하는 대학생들,이름을 부르며 일행을 찾아 헤매는 사람 등등.산등성이 너머 경사면에도 삼삼오오 바람을 피해 웅크리고 앉아 있다.아직 캄캄한데도 벌써 4천명 가량은 돼 보였다.

계미년 첫 해오름을 구경하고자 어둠을 헤치고 추위와 싸우며 올라온 사람들이다.

대부분이 점퍼·목도리·모자·장갑 등으로 중무장한 차림이지만 가벼운 복장으로 올라온 젊은이들도 꽤 보인다.구두를 신고 올라온 김정식(金程植·24·회사원)씨는 “충장로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새벽 2시께 출발했다”며 “빙판길에 여러 번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겨우 올라왔다”고 말했다.

코흘리개부터 노(老)부부까지 “야∼호∼”“대∼한민국”을 외치는 가운데 장구·꽹과리를 치며 해가 빨리 뜨길 재촉하는 이들도 보였다.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동편 능선들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지만 일출 시간(오전 7시41분)이 지나도 태양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사람들은 구름을 원망하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매년 부인과 함께 해맞이하러 온다는 이충렬(李忠烈·47)씨는 “해는 못봤지만 가족들의 건강과 우리나라의 평화를 빌었다”며 하산 길을 서둘렀다.

중머리재에만 이날 새벽 1만여명이 다녀갔다.장불재(해발 9백m)·입석대(1천17m)·서석대(1천1백m)에도 모두 4천여명이 올랐다.

올해 첫 날도 어김없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무등산을 찾았다.

◇산중에는 자유가 있었네=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무등산 해맞이를 하게 된 데는 특별한 유래가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5년 마지막 날.‘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으로 구속됐다 풀려난 전남대생 18명과 선·후배 등이 이날 이곳에서 송년 모임을 가진 게 발단이 됐다고 한다.

이들은 당시 윤강옥(尹江鈺·51·당시 전남대 사학과 재학)씨 집에서 밤새 막걸리를 마신 뒤 새벽에 눈이 무릎까지 쌓인 무등산에 올랐다.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기획이사인 尹씨는 “당시는 모이는 것조차 쉬쉬해야 해 일출을 보며 민주화 소망을 빌고 조용히 내려왔었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이후에도 매년 망년회 뒤 무등산에 올랐고,해를 거듭하면서 참여자가 늘어났다.

80년 5·18을 계기로 참여자는 더 늘게 됐다.연말이면 YWCA 등에서 한 해 결산 모임을 가진 재야 인사들이 무등산으로 향했다.두툼한 옷에 소주·막걸리 몇병이면 족했지 따로 준비할 것도 없었다.산중(山中)은 어둡고 추웠지만 산하(山下)와 달리 자유가 있었다.따라다니는 정보과 형사나 안기부 직원도 없었다.

계엄군 총칼에 죽은 친구,감옥에 간 선후배 등을 얘기하노라면 슬픔은 곧 울분으로 변했다.산 밑 세상을 향해 “전두환 ×××”라고 소리를 지르고,술잔을 나누며 ‘아침이슬’등을 부르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았다.솟는 해를 바라보면서 민주화를 염원한 뒤 하산하면서 투쟁 의지를 다졌다.

민주쟁취국민운동 광주전남본부 사무처장이었던 이강(李鋼·55)씨는 “80년대 중반에 올라가 보면 재야단체와 은동권 학생 수십팀이 적게는 대여섯명,많게는 수십명씩 곳곳에서 모닥불을 피운 채 토론하곤 했다”고 말했다.

87년 6·29선언 이후엔 무등산 해맞이가 일반인에게 알려지면서 원단(元旦) 등반객이 크게 늘어나게 됐다.친구와 함께,연인끼리,가족 단위로 산을 찾았고,많은 해에는 3만명 이상이 모였다.

중머리재·장불재 등에서 해돋이를 보며 소망을 빌고 만세삼창을 한 뒤 덕담을 나누며 하산하는 게 광주의 새해 첫날 풍속도로 자리잡은 것이다.

◇생태계 훼손은 문제=무등산 해맞이 참여자가 급증하면서 폐해도 적지 않다.

새벽에 올라가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추위를 이기기 위해 나뭇가지를 꺾어 불을 피우는 바람에 산불이 나기도 했다.또 어두운 틈을 타 음식물 포장지 등을 마구 버려 날이 새면 쓰레기 천지로 변하곤 한다.

때문에 광주시는 연말이면 산림 훼손과 산불 위험을 이유로 무등산 산행 자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양정두(楊正斗) 무등산관리사무소장은 “불과 몇시간 동안 많은 사람이 두세 개 등산로로 오르내리다 보니 산이 몸살을 앓는다”고 말했다.

또 임낙평(林洛平·45) 광주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유래를 생각하면 무등산 해맞이를 계속 이어가야겠지만 부작용이 워낙 커 그러자고 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고 밝혔다.

광주=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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