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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읽으며 철학 지식 '쏙쏙'

중앙일보

입력

신간 『알도와 떠도는 사원』은 추리.환상소설의 얼개 속에 서양 근대 철학의 핵심 개념과 철학사적 지식을 녹여낸 국내 저자의 혼합형 소설이다.

현실과 환상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팬터지 소설이 깊이가 얕다고 비판받는 우리 출판계에서, 또 청소년 대상의 고급 인문서가 절대 부족한 독서시장에서 전례없이 시도되는 이 형식은 재미와 교양을 갖춘 '지식소설' 의 등장을 알린다. 서양철학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다.

소설과 철학을 결합한 같은 형식으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소피의 세계』(현암사.전3권) 에 견줄만도 한 신간의 저자는 김용규(49) 씨. 그는 독일 프라이부룩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10년간 서양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정통연구자이다.

스토리의 얼개는 이렇다. 기원전 1만5백년 고도의 문명을 누리던 제국이 송두리째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우주의 기원과 영생의 비밀을 담은 비서 '나칼의 서' 만은 남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부가 그것을 배에 나누어 싣고 제국을 떠나게 된다. 바로 이때부터 우주의 진리를 담은 사원들이 지구를 떠돌기 시작했다고 설정된다.

여기서 '나칼의 서' 니 '떠도는 사원' 이니 하는 것은 저자가 설정한 트릭이자 재미며 궁극적으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다. 하지만 시간을 훌쩍 건너뛴 21세기 초 그 손가락만 보고 헛된 도전에 나선 인물들이 등장한다.

나칼의 서를 찾는데 평생을 바친 인도의 한 대학 교수는 추적과정에 가족을 다 잃고 급기야 신비주의 강신술(降神術) 에 중독돼 온갖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소설속의 더욱 큰 음모는 과학과 이성이란 미명으로 전개되는 무모한 도전들이다.

서양 과학의 발달을 이룩한 이성의 힘에 도취된 근대인들은 마침내 고도의 컴퓨터 기술과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새로운 인종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현대판 나칼의 서이자 인간 이성의 교만함의 극치로 설정되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철학사에서 인간 이성이 신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는 양면성을 되물으며 근대성 전체에 대한 성찰을 제기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가 밀랍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오르다 추락하는 것처럼 인간의 이성이란 날개도 파멸에 이를 수 있음을 경고한다. 소설은 이성의 검과 그 이성의 날카로움을 제어할 지혜의 등을 양손에 들고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중용의 날갯짓을 펼치길 권유한다.

결론적으로 저자가 가리키는 달은 이렇다.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는 영생의 비밀과 강신술같은 신비적 수단이나 지놈 프로젝트 같은 과학적 수단이 아니라 자유.평등.사랑.희생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만 구현될 수 있다. "

책 제목의 알도는 소설의 주인공인 15세된 독일 소년 이름이다.

총명한 알도와 다른 등장인물간의 대화 혹은 논쟁을 통해 연역법.귀납법.합리론.경험론.계몽주의.칸트의 구성론과 도덕론, 마투라나의 급진적 구성주의,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 그리고 진화론.우생학.유전자공학.생물학적 결정론 등 서양철학과 과학에 대한 친절한 해설들이 이어진다.

저자가 청소년들이 흥미를 끌만한 인공두뇌 컴퓨터 인간도 주요 인물로 등장시켜 서양철학을 맛깔나게 풀어낸 이 책과 앞서 소개한 『우리말 철학사전』(33면 참조) 의 문제의식은 동일하다.

사회 곳곳에 '전문가 바보' 들의 도구적인 이성만 난무할 뿐 심미적 이성은 결여한 현대사회에서 젊은이들이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주목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어쨌든 팬터지 문학에 충분한 철학적 훈련을 받은 이의 참여는 반가운 일이다.

김씨의 첫 소설인 이책은 5개 주제별로 주제당 2권씩 완결구조를 가지며 총 10권이 '알도 시리즈' 로 출간될 예정이다.

1, 2권이 근대성에 대한 총체적 반성을 주제로 했다면, 곧이어 출간될 3, 4권은 환경파괴를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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