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 세상을 말하다] 淮南子 회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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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반역이 두려웠다. 반역은 싹부터 없앴다. 무고한 희생자가 속출했다. 한(漢) 고조 유방(劉邦)의 손자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은 비극적인 케이스다. 할머니는 고조, 아버지는 문제(文帝), 자신은 무제(武帝)에 의해 반역자로 몰렸다. 3대가 모두 자살로 무고(無辜)함을 주장했다.

유안은 학문을 좋아했다. 수천 명의 선비를 식객으로 두고 학문을 토론했다. 회남자(淮南子)는 이들과 나눈 집단 지성의 기록이다. 유안은 조카뻘인 무제에게 이 책을 헌정해 제국 경영에 참조하기를 바랐다. 그는 “책 21편을 통해 천지의 이치(天地之理)를 탐구하고, 사람의 일(人間之事)을 파악하고, 제왕의 길(帝王之道)을 구비했다”고 적었다. 도가(道家)적인 자연관을 바탕으로 집권보다 분권, 획일보다 다원(多元)을 옹호했다. 당시의 사상계는 황제(黃帝)신앙과 노자(老子)사상을 결합한 황로학(黃老學)과 동중서(董仲舒)의 유학(儒學)이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었다. 무제는 “백가를 배척하고 오직 유교만을 숭상한다(罷黜百家 獨尊儒術)”며 황제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옹호하는 유교를 선택했다. 이때부터 회남자가 제시했던 대안의 길은 동아시아 사상계의 주류에서 밀려났다.

유교는 위계질서를 중시한다. 소국은 대국을 섬길 것을 요구한다. 회남자의 ‘사대론(事大論)’은 유교적 국제질서의 허상을 폭로한다.
“외교로 원조를 구하고 대국을 섬겨 안전을 보장받는 것은 내정을 튼튼히 하면서 시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 무릇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는 진귀한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비굴한 언사를 써야 한다. 진귀한 보물로 섬긴다면 재화가 바닥나더라도 (재물을 받는 자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것이고, 몸을 낮춰 좋은 말로 비위를 맞추면 아무리 상대를 달래도 정상적인 교류관계가 맺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조약을 맺으면 규약이 정해져도 바로 등을 돌린다. 비록 나라의 반을 쪼개어 바치더라도 스스로 믿을 만한 도가 없으면 나라를 온전히 보존할 수 없다.”

중국이 다시 굴기(崛起)하자 미·일·러가 모두 ‘아시아 귀환’을 외친다. 갈수록 격화되는 영토 분쟁과 군비 경쟁 뉴스를 볼 때마다 패권(覇權)을 거부한 회남자의 지혜를 반추(反芻)하게 된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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