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노다 총리의 뒤바뀐 ‘전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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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김현기
도쿄 총국장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가 지난 주말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지와 인터뷰를 했다.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 참석을 앞두고다. 노다 총리는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중대발언을 했다.

 그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 어떤 지혜를 낼 수 있을지 물밑에서 (한국 측과) 의견을 교환 중”이라고 했다. 사실이라면 빅 뉴스다. 하지만 한국 외교부는 즉각 이를 부인했다. 복수의 일본 정부 관계자들도 “일련의 흐름을 이야기한 것인데 시제가 잘못 전달됐다”고 해명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냉각된 양국 관계, 임박한 정권교체 등을 감안하면 양국 간에 본격적인 협상이 이뤄질 상황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노다 발언의 진위가 아니다. 그가 덧붙여 밝힌 ‘위안부 협상을 위한 전제조건’에 있다. 그는 “1995년 설립된 ‘아시아 여성기금’에 대해 한국에서도 당초 긍정적 평가가 있었지만 도중에 입장을 바꿨다. 그것이 양심 있는 일본인들에게 상처를 줬다. (일본의 노력에 대한) 평가를 먼저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우선 일본의 성의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아시아 여성기금은 1990년대 초 위안부 문제가 불거지자 일본이 ‘민간 자금’을 동원해 만든 기금이다. 일 정부도 일부 출연했다.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1인당 200만 엔을 지급하려 했다. 하지만 위안부에게 전해지는 돈은 철저히, 그리고 교묘하게 ‘민간 자금’을 고수했다. 일본의 ‘국가책임’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시아 여성기금의 설립 취지 자체가 국가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어디 그뿐이랴. 일본은 돈을 지급하면서 ‘인도적 지원’이라 했다. ‘배상’이란 표현을 거부했다. 그러면서 자선기금 주듯 처리하려 했다. 한국 내 위안부 할머니들 대부분이 뒤늦게 수령을 거부한 까닭이다.

 그걸 두고 이제 와 “필리핀·대만 등은 받았는데 한국은 왜 입장을 바꿨나”라고 하는 건 본말전도의 극치다. 그 일로 진정 상처를 입은 건 양심 있는 일본인이 아니다. 오랜 세월 피눈물을 흘린 위안부 할머니 당사자다. 그리고 한국인이다. 노다 총리의 말은 앞뒤가 뒤바뀌었다.

 위안부 협상의 전제 또한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일본의 성의를 인정하고 말고 하는 따위가 협상의 전제가 될 수 없다. 엄연히 행해진 인권유린에 대해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겸허하게 사과하고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게 진정한 협상의 전제다. 그게 출발점이 돼야만 일본의 성의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긴 노다 총리가 그런 자각과 역사인식을 갖고 있었다면 한·일 양국의 갈등이 지금 이렇게까지 커지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