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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초모랑마] 휴먼 원정대, 인천에서 티베트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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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18일 오전 10시10분(한국 시간 오후 1시 25분). 산악인 박무택(당시 35세)은 후배 장민(당시 26세)씨와 함께 초모랑마(8850m, 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이름) 정상을 밟았다. 그로부터 1시간. 그들은 고도 1백m를 낮췄으나 박씨의 설맹(눈 표면에서 반사된 태양의 자외선이 눈에 들어와 일어나는 장애)과 후배 장씨의 탈진은 이들을 최악의 순간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2시30분 경 다음 날 정상 등정을 위해 캠프5(8천3백m)에 올라 온 선배 백준호(당시 37세) 씨는 후배들의 조난을 접하고 오후 8시경 단독으로 구조를 떠났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들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버리고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길을 떠났다. 그리고 1년 뒤인 지난 달 14일 산악인 엄홍길(트렉스타, 45세)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대원 7명과 함께 히말라야로 원정을 떠났다. 이제 자신들의 행위로 산악인들의 순수한 열정을 보여주는 대서사시가 시작됐다.

5년만에 떠나는 히말라야 원정. 그 동안 파키스탄의 낭가파르밧(1995년 여름, 8천1백25m)과 K2(2000년 여름, 8천6백11m), 네팔의 안나푸르나(1999년 봄, 8천91m)와 칸첸중가(200년 봄, 8천5백86m)를 다녀왔지만 그래도 마음은 무척이나 설레었다. 매번 겪었던 고소증세 때문에 아내는 무엇 하러 히말라야에 또 가느냐고 했지만 ‘히말라야는 하얀 설산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마약’이었기 때문에 무서운 고소증세를 생각하면서도 배낭을 꾸릴 수 밖에 없었다.

3월14일 오후 5시30분경, 인천국제공항 3층 출국장.

19명의 대원과 관계자들이 나온데다 MBC 프로그램에 생방송이 물려 있어 어수선하다. 빙송이 끝나고 짐을 체크하니 이미 초모랑마에서 1달 반 동안 먹을 식량과 공동 장비를 4톤이나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대원들의 짐이 1. 5톤을 육박했다. 다행히 항공사에서 어느 정도 무게를 감안해 줘 약간의 수수료만 물고 출국장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방콕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원정대 손칠규(52, 내륙말생산자협회장) 원정대장은 “이번 원정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휴먼원정대이지만 자칫 본래 취지에만 매달리다 보면 원정대 분위기가 가라 앉을 수 있고 이는 또 다른 사고와 연계될 수도 있다”며 “원정대의 분위기를 최대한 밝게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인지 내릴 때가 되니까 몇 몇 대원들은 베이스 캠프에서 사용할 와인 잔과 카드놀이를 할 담요를 슬쩍(?)한다.

방콕 돈무앙 국제공항에서 8시간을 대기한 끝에 대원들은 네팔 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3월15일 카투만두에 도착했다. 30달러의 1개월짜리 체류 비자를 받고 짐을 찾는 곳으로 나오니 네팔 한국대사관의 정용관(49) 영사가 나와 계신다. 지난 1983년 3월 히말라야가 좋아 자원해서 이 곳으로 온 지 올해로 벌써 22년. 그 이후 히말라야를 찾은 모든 산악인은 음으로 양으로 정영사에게 도움을 안 받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국 산악계 히말라야 원정사의 산 증인으로 손꼽히는 분이다. 덕분에 우리는 원정대 모든 짐을 조사없이(?) 나올 수 있었다. 1주일전 선발대로 먼저 온 정오승(43), 이길봉(국립공원관리공단 설악산 지부 안전요원, 37), 전경원(계명대 OB, 32) 대원도 밖에서 본대를 반갑게 맞는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매연과 먼지, 그리고 무질서한 교통질서는 2년 전 마지막 찾은 네팔과 마찬가지다. 싱기호텔(한국의 일반 호텔급)에 도착해 여장을 푼 대원들은 숨돌릴 겨를 없이 각자 맡은 일에 분주하다. 이틀 뒤에는 고소적응을 위한 아일랜드 피크(6천1백45m) 등반을 떠나기 때문에 잠시의 짬도 없다. 26일에는 대원과 셰르파들의 상견례가 있었다.

4번의 원정 짐을 꾸렸지만 이번처럼 대원, 셰르파 수가 많았던 적은 처음이다. 고인경(㈜파고다 아카데미 회장) 단장과 18명의 대원, 그리고 18명의 셰르파와 쿡 1명, 키친보이 4명 등 42명의 대 식구다. 이처럼 인원이 많은 것은 이번 원정이 얼마나 힘든 가를 말해준다.

8000m대 산을 등정한다는 것은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것 만으로도 내 몸을 추수르기 힘든데 이번 원정은 8천7백50m에 있는 시신을 끌어내려야 하기 때문에 산악계에서는 정상 등정보다도 더 힘들다고 말한다.

다음은 고소 적응을 위해 떠났던 임자체봉(6천1백45m, 일명 아일랜드 피크)까지의 일정을 일지 형식으로 소개한다.

*3월17일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국내선 청사를 찾았다. 공항으로 가는 길 가에는 평소보다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다. 지난 1월 하순 네팔 왕이 자신의 권력을 공공히 하기 위해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촉발된 네팔의 불안한 정정을 말해 준다. 루크라 행 경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루크라는 삼면이 5천m 이상의 산으로 둘러싸인 에베레스트 원정의 관문이다.

해발 2천8백m에 있는 이 공항은 활주로의 길이가 5백m 남짓할 정도로 짧지만 그래도 활주로가 오르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17인승 이하 경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하다.

루크라에서 약2시간 30분을 걸어 팍딩(2천6백m)까지 이동해 하루를 묵었다. 그래도 고도가 높다 보니 속이 조금은 울렁거린다. 내일은 해발 3천4백m의 남체 바자르까지 가야 한다. 겁이 든다. 6년 전 엄대장과 함께 갔던 안나푸르나 원정이 떠올려 진다. 당시 6일간의 캐러반 끝에 4천3백m의 뚤루부긴을 넘어갈 때 구토와 지독한 두통으로 이틀을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못했던 악몽이 되살아 난다. 겁이 난다.

*3월19일

어제 약 6시간 여의 캐러반 끝에 남체에 도착했다. 히말라야 원정은 우선 고소와의 전쟁이다. 인간이 산소가 평지의 50~60%밖에 안 되는 고도 3천m을 올리면 우선 고소증세가 나타난다. 그리고 심하면 폐수종이나 뇌수종으로 사망까지 갈 수 있다. 특히 밤에는 기압이 낮아지고 추워 산소가 더 희박해 고소증세가 심해진다. 그래서 많은 롯지의 벽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적혀 있다. ’위험한 고소증세. 죽음은 밤을 기다리지 않는다’그래서 고소증세가 심각해 속이 매우 심하게 울렁거리고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못한다면 빨리 하산하는 것이 최상책이다. 고도를 5백m만 낮춰도 고소증세는 씻은 듯이 사라진다.

지난 1993년 푸모리 원정대의 김준호(당시 20세)는 캐러반 도중 텡보체(3천8백m)에서 폐수종으로 사망했다. 일반적으로 ‘생리학적으로 사람이 생활할 수 있는 고도는 5천2백m가 한계며 그 이상에서는 어떠한 사람도 고소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오늘은 매주 토요일 남체에 장이 서는 날이다. 멀리는 걸어서 1주일 걸리는 지리에서 올라오는 방물장수를 비롯해 야채, 닭, 야크고기, 치즈 등을 갖고 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래서 남체가 남체 바자르로 불리우고 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티벳인들이 야크 고기를 가져와 소금이나, 쌀과 바꿔 갔다는데 이들이 중국의 싼 음료 등을 가져와 팔다 보니 남체 주민들이 쫒아내 걸어서 지금은 한 시간 걸리는 산 속에서 그들의 장이 선다고 한다.

대원들은 임자체봉 베이스에서 필요한 식품 등을 구입했다.

*3월20일

남체를 출발해 고도 1백m를 올려 뒷산을 30여분 돌아가니 눈 앞에 에베레스트와 로체, 아마다블람의 장엄한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잠시 머리가 아픈 것도 잊고 그 모습에 얼이 빠진다. 오늘의 목표는 해발3천8백m의 텡보체. 부지런히 걸어 3천2백m의 풍키텡카에 도착하니 배가 출출하다. 아홉 명의 대원이 모여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대부분의 메뉴는 어느 롯지를 가나 토스트, 롤 등의 빵 종류와 라이스 종류, 그리고 야크나 치킨 스테이크가 주종이다. 특히 이 곳의 감자 맛은 일품으로 찐 감자나 포테이토 칩이 인기를 끈다. 음식은 보통 80~3백50루피(1루피에 15원 정도). 아홉 명의 점심식사비가 음료수를 합쳐 3천2백70루피가 나왔다.

2인1실로 된 롯지의 하루 숙박료는 1백~1백50루피로 저렴한 대신 식사를 사먹어야 하며 그렇지 않고 잠만 잘 경우는 숙박료가 5백루피로 올라 간다. 풍키텡카에서 가파른 산을 2시간여 올라 텡보체에 도착하니 많은 대원들이 고소증세를 조금씩 호소한다.

*3월23일

21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임자체 베이스캠프로 갈라지는 딩보체(4천2백m)에서 잔 후 임자체봉으로 가는 마지막 롯지인 추쿵(4천8백m)에 도착했다. 여기서 고소적응을 위해 하루를 묵었다. 가만히 있어도 머리가 아픈 고도. 많은 대원들이 조금씩 몸을 추스리며 뒷산(5천m)에 올랐다. 그러나 전경원(32), 김인환(27, 이상 계명대 OB)대원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딩보체로 하산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남은 대원 모두 식당에 모여 노트북에 DVD를 넣고 한국 영화를 감상했다.

*3월24일

드디어 나에게도 이상이 왔다. 아침에 스프도 입에 넣지 못할 정도로 심한 고소증세가 나타났다. 그래서 나머지 대원들이 베이스캠프로 올라갈 때 기자는 혼자 딩보체로 하산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두 명의 대원을 끌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팡보체(3천9백m)까지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3월26일

컨디션은 그럭저럭 좋다. 어제는 포터를 시켜 일반인은 이틀 거리에 있는 남체로 닭을 사 보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그 거리를 식사까지 하고 8시간 만에 돌아왔다. 그래서 간만에 저녁식사로 백숙을 찌어 먹으니 오랜만에 대원 세 명의 입맛이 돌아왔다. 낮에 무료하게 있는데 오종택(44, 중앙일보 사진 기자), 심산(45, 작가)씨가 내려왔다. 이들 말로는 전날 엄대장과 정오승, 박창수(36, MBC 카메라 맨)대원과 셰르파 4명이 임자체봉에 올랐는데 하산 도중 일본 산악인 오카모도 마사오(61)씨가 설사면에 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국 대원들이 헬기가 닿을 수 있는 곳까지 하산해 주었다며 이를 중앙일보에 송고하기 위해 내려왔다고 전한다.

부리나케 짐을 싸서 지난 20일 묵었던 텡보체에 도착했으나 위성전화가 말썽을 피운다. 결국 기사를 보내지도 못 하고 다음날 남체로 내려가기로 했다.

*3월27일

아침 일찍 남체에 내려와 기사를 보내고 점심에는 오랜만에 와인과 맥주를 마신 후 잠시 낮 잠을 즐겼다. 저녁에는 이 곳에서 우연하게 만난 로부제 서벽 원정대를 이끌고 히말라야에 들어 온 후배 강성우(43)를 만났다. 덕분에 세 명의 대원들은 이들 롯지를 찾아가 쌍치 쌈에 불고기와 김치, 그리고 된장국을 곁든 저녁 식사를 푸짐하게 대접받았다. 로부제 봉 서벽은 지난 1995년 일본 산악인이 올랐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세계적으로 공인을 받지 못해 아직까지도 초등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이다. 베이스 캠프에서 1천m이상의 벽등반을 해야 하는 험한 곳이다.

*3월30일

네 명의 대원이 먼저 카투만두에 도착했다. 남체에서 내려올 때는 선우중옥(64)씨가 참가한 한양대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만났다. 선우중옥씨는 도봉산의 암벽 등반루트인 ‘박쥐코스’를 1960년에 초등했고 1963년에는 이본 취나드와 함께 북한산 인수봉의 ‘취나드코스’를 초등한 재미 산악인으로 2003년 초에는 산악작가인 릭 리지웨이가 친구 산악인과의 우정을 담아 쓴 ‘아버지의 산’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리고 30일 루크라 비행장에서는 개교 100주년을 맞아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구성한 양정고팀도 만났다.

한편 카투만두에 도착하니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25일 오후 3시에는 푸모리봉(7천1백61m)에서 등정을 마치고 하산하던 파나마 산악인 알렉산더 이반 첸 아로차(35)가 셰르파 푸르바 따망(25)와 함께 정상 2백m 아래 지점에서 강풍을 만나 1백m를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고 29일에는 한국 푸모리 원정대 다섯 명의 대원과 세 명의 셰르파가 정상을 밟았으나 그 중 두 명의 대원이 하산 도중 실종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산악인 토니 하벨러는 “죽음·암흑과 인생찬가가 산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등을 대며 달리고 있다. 그 사이 좁은 길이 지나가며 가냘픈 줄을 타고 알피니스트들이 행동한다.”며 목숨을 담보로 무상(無償)의 행위를 펼치는 산악인들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히말라야에서는 어느 누구나 생과 사의 갈림 속에서 도전 정신 하나로 자신과의 숨막히는 싸움을 하고 있다. 이처럼 목숨을 잃는 현실 속에서도 전세계 산악인들은 오늘도 네팔 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

그리고 네팔의 현정부를 반대하는 마오이스트들이 4월3일부터 10여일간 반대 투쟁을 벌인다고 해 티베트로 넘어가는 길이 막힐 것으로 보여 카투만두에 돌아온 대원들은 4월2일 티베트로 넘어가기 위헤 쉴 틈 없이 원정 준비에 여념이 없다.

히말라야 설산에 도전하다 운명을 달리한 산악인들이 지난 해 목숨을 잃은 계명대 산악인 세 명뿐이겠는가. 1962년 경희대 다울라기리2봉 정찰대가 히말라야에 발을 디딘 지 42년간 95명의 한국 산악인은 히말라야에서 사선 사고로 불의의 객이 됐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8091m)를 초등한 프랑스 산악인 모리스 에르조그는 "인간이 이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이루려고 해도 이루지 못하는 목표"고 말했다.

인간이 머무를 수 없는 그 곳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이들 세 명과 엄대장의 행동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상이라고 여기는 피보다 진한 동료애를 느낄 수 있다.

이제 세 명의 산악인은 생명도 없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별세계-히말라야 초모랑마 어느 벽 아래 둥지를 틀었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 이들의 진한 우정을 잊지 않기 위해 마음 속에 케른(돌탑)을 쌓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자의 몫이다.

이제 원정대는 지난 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설산에서 엄습하는 죽음 앞에 절망감과 싸워야 했던 박무택씨와 선배를 홀로 두고 탈진상태에서 하산하는 장민씨, 그리고 자신의 목숨보다도 동료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고 죽음의 사선을 넘었다가 돌아오지 못한 백준호씨-죽음조차도 가로 막지 못한 이들의 진한 우정을 찾아 대장정의 길을 떠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의 창조물이다.

우리와 우리가 사랑했던 모두는 한동안 망망대해의 큰 물결 위를 함께 떠다니다 헤어지는,

영원히 헤어지는 한 조각의 나무 부스러기와 같다. ’(힌두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

원정대 입산료와 트레킹 피

해외원정은 80년대 중반까지 대규모 원정대가 캠프건설을 하며 공격하는 등정스타일이 주류였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팀 당 4~5인의 소수 정예대원이 단시일 내 등정하고 내려오는 알파인 스타일로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다.

네팔의 원정대 입산료
(단위:달러)

대상산

요금

에베레스트 사우스콜
(인원 관계없이)

5만 

기타루트

1인 2만5천
2인 4만
3인 4만8천
4인 5만6천
5인 6만
6인 6만6천
7인 7만

8천m이상(7명 기준)

1만

7천5백1~7천9백9m(“)

4천

7천1~7천5백m(“)

3천

6천5백1~7천m (“)

2천

6천5백m 이하(“)

1천

히말라야 입산료는 1990년대 들어 두 번이나 조정됐다. 지난 1994년에 이어 96년에는 히말라야 입산료가 대폭 올라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히말라야 입산료 조정은 세계산악연맹(UIAA)산하 원정분과위원회에서 결정된다. 1994년 입산료 조정 때는 셰르파와 포터 등 양질의 등반 서비스를 갖춘 네팔이 입산료 인상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해외원정대는 예산확보의 어려움을 겪게 돼 에베레스트 등정의 대명사인 네팔의 ‘사우스 콜’루트를 기피하는 결과를 낳게 됐다. 이에 따라 95년에는 입산료가 비교적 싼 인도나 중국루트를 이용한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크게 늘었다.

 에베레스트의 일반 루트인 ‘사우스 콜’루트를 이용한 에베레스트 입산료는 인원수 관계없이 7명 기준으로 5만달러를 받으며 다른 루트는 1인 2만5천달러에서 7인 7만달러까지 인원수에 따라 다양하게 받는다.

그런가 하면 트레킹 피는 4인을 기준으로 3백50달러를 받으며 9인까지는 추가로 기준 인원을 제외하고 1인당 40달러, 12명까지는 추가인원에 대해 1인당 25달러를 받는다.

셰르파, 쿡과 일반 포터들의 수입

원정을 떠나는데 셰르파·쿡·키친보이·포터는 필요한 존재다. 이들의 역할분담은 각각 정해져 있으며 그 중에서도 셰르파는 정상 등정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포터는 캐라반을 시작하면서 베이스캠프까지 짐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들은 1인당 25~30㎏의 짐을 수송하며 일당 5달러(식비 포함) 정도를 받는다. 그런가 하면 베이스까지 짐을 실어 나르는 야크는 1마리가 25~30㎏의 짐 두개를 싣는데 야크는 약 7달러를 받는다.

쿡과 키친보이는 원정을 마칠 때까지 원정대와 같이 생활하며 장비 비용과 일당을 받는다. 일당은 쿡 5~6달러, 키친보이 4달러며 장비비는 대상 산에 따라 다르지만 쿡 1천5백 달러, 키친보이 1천~1천5백달러를 받는다.

셰르파는 정상까지 등정하는 셰르파와 고소캠프에 짐을 수송하는 고소포터로 나뉜다. 셰르파는 사다 셰르파(셰르파 중 우두머리)가 추천하면 원정대장이 그들의 신상명세서를 보고 뽑는다. 이들에게는 1천5백~2천달러의 장비비가 지급된다. 그리고 사다 셰르파의 장비비는 이보다 웃돈다. 그러나 이들은 크램폰(빙벽에서 사용하는 12발짜리 아이젠), 아이스 피켈, 아이스 바일 등의 장비를 구입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줄로 갈아 날카롭게 해 재사용한다. 그래서 베이스 캠프에 들어가 초기에는 이런 작업을 하는 셰르파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셰르파들은 하루에 7~8달러의 일당을 받는다.

네팔의 일반 회사 초봉이 5천루피, 대학교수의 본봉이 1만 루피인 점을 감안하면 원정기간 중 하루 7~8달러의 일당을 받는 셰르파의 수입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히말라야 등반은 고소와의 전쟁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했을 때에야 원정의 반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원정대는 3월말 네팔의 임자체봉에서 고소적응을 마치고 4월5일 마오 반군들의 반정부 활동으로 카투만두 공항에서 26인승 헬리콥터를 이용했다. 러시아제 헬리콥터는 어느 집 뒷마당에서 조립한 것처럼 엉성해 보였다. 승무원은 출입문의 걸쇠를 걸더니 귀를 막으라고 솜 뭉치를 건네준다. 잠시 후 덩치 튼 하마는 사람의 정신을 빼놓을 정도의 엄청난 굉음과 함께 허공으로 떠올랐다.

덕분에 육로로 5시간 이상 걸리는 네팔과 중국의 국경지대인 코다리까지 20분만에 도착했다. 10일 후 초모랑마 베이스 캠프에서 들은 이야기이지만 러시아 원정대는 육로로 이동하다 마오 반군의 포격을 맞아 대장과 대원이 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 정부가 1940년대 말 대륙을 통일한 후 50년대 눈을 돌려 침공한 곳이 티베트고 아직도 티베트 망명정부와 중국과의 알력은 국제문제로 남아 있다.

달라이 라마 정부의 망명

국내 최고의 티베트 인문 지리소개서로 꼽히는 김규현의 ‘티베트 역사산책(정신 세계사편)에 보면 제 14대 달라이 라마 텐징 갸초(Tenzin Gyatso,1935~)는 1951년 섭정 상태에서 나라의 통치권을 물려받았지만 결국 2개월 후 전문 17조로 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결국 주권을 중국에 넘기고 말았다.

그러다 1959년 중국 정부가 달라이 라마를 납치한다는 소문에 그 동안 참고 있던 티베트 민중은 국권을 다시 찾고자 대규모 무장 봉기에 돌입하지만 결국 수백만 명의 희생자만 내고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정부 조직과 고위 승려,귀족들은 수도인 라싸를 떠나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 길에 오르게 돼 오늘에 이르게 된다.

현재 중국 티베트는 서장(西藏)자치구로 바뀌어 티베트 민중보다 더 많은 한(漢)인이 이주해 살고 있어 대 도시에는 이제 티베트의 풍물을 찾기란 쉽지 한다.

중국의 ‘죽(竹)의 장막’정책은 7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다 세계적인 지탄을 받자 제한적 개방정책을 사용하게 되고 그 일환의 하나가 당시 국경분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도 대신,역시 인도에 둘러싸여 답답한 심정에 처해 있던 네팔 왕국과 손을 잡고 두 나라를 잇는 무역로인 ‘우호도로’ 건설에 착수한다.대설산(大雪山) 히말라야를 넘고 깊은 계곡에 다리를 놓고 광활한! 사막을 가로지로는 설역고원 최대의 공사로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장무까지 장장 7백24km에 이르는 설역고원 최대의 역사였다.지금도 이 도로는 네팔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4월5일

코다리에 도착해 걸어서 다리를 건넌다. 다리 이전과 이후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다리를 건너기 전 광경은 아이를 한 손에 끌고 자신보다도 더 큰 짐을 등에 인 채 다리 건너까지 짐을 날라주는 네팔인들의 비참한 삶의 현장이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자 건물부터 다르고 길가에는 뜨개질을 하면서 산뜻한 옷을 입고 달러를 바꾸자는 중국 처녀들이 대부분이다. 중국측 국경 다리에서는 단지 방역검사만 하고 여기서 티베트의 첫 마을인 장무(2천3백m) 까지 차량으로 이동한다.

장무는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 급경사 비탈길을 중심으로 조성된 마을이다. 사실 티베트의 주도인 라싸를 들어갈 때 비행기를 이용해 청뚜(成都)를 거쳐 들어가는 것보다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에서 코다리를 거쳐 장무로 이동하는 코스는 히말라야의 무궁무진한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추천할 만한 코스다. 광활한 티베트 고원을 한없이 달리는 맛이 있고 중간에 5000m급 고개를 세 개나 넘어야 하기 때문에 고소증 예방에도 좋을 듯 싶다. 다만 정정이 불안할 경우 헬리콥터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더 들 수 있다.

장무는 코다리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지만 시차는 무려 2시간 15분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장무는 베이징(北京)시간을 표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오후 8시가 넘어도 해가 지질 않는다.

히말라야 원정에 관한 모든 수속을 비롯해 차량 통행 허가증 등 일체의 수속은 중국티베트산악연맹(CTMA)에서 관장한다. 여기서 차량 통행 허가증을 받고 장무를 출발한 것은 오후 4시40분(한국 시간 오후 5시40분). 약 3시간을 달리니 히말라야의 고원 도시인 니알람(3천7백50m)에 닿았다. 모든 숙소나 식사도 CTMA가 허가한 곳에서 해결해야 한다.

*4월6일

한 때는 바닷속이었다가 지금은 지구의 지붕으로 불리는 태초의 광야를 미니버스를 타고 한없이 달린다. 초원 지대를 벗어나니 풀 한 포기 없는 적갈색 땅으로 들어선다. 둥글 둥글한 민둥산이 이어지고 왼편으로는 만년설을 머리에 인 시샤팡마(8천46m)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급경사 길을 한참 오르니 고원지대의 높은 고개인 총라(5천1백25m, 일명 라룽라)다. 멀리 쿰부 히말의 연봉이 빛난다. 동물도 살지 않는 곳. 인간의 염원을 담은 다루 쪽(불경의 주문을 담은 깃발. 티베트 인들은 깃발이 한번 흔들릴 때마다 주문이 신에게 전해진다고 생각한다. 깃발에는 주문 뿐 아니라 날개 달린 말 그림도 있는데 셰르파들의 언어로 깃발을 ‘룽타(바람의 말)’. )만이 바람에 펄럭인다. 그리고 고원 도시인 올드 딩그리(4천3백90m)에 닿았다.

‘티베트인들의 창세기 전설에 의하면 히말라야가 있던 자리는 옛날에는 망망대해였다. 그러다 육지가 형성되면서 인간들은 자손을 키우고 낙원으로 만들었다. 그런 어느 날 바다 속의 다섯 용이 나타나 낙원을 폐허로 만들자 오색 구름이 다섯 여신으로 변해 용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중생들의 간청으로 다섯 여신은 바닷물을 몰아내고 동쪽은 울창한 산림, 서쪽은 넓은 농경지, 남쪽은 기화요초가 핀 낙원, 북쪽은 광대무변한 목장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 곳에 나란히 큰 산으로 변했으니 그 중 큰 언니가 바로 ‘초모랑마(세상의 여신이자 어머니라는 뜻)’여신이다. ’-김규현의 티베트 역사산책에서

이 곳은 해와 달과 별들의 고향이다. 아침이 되면 찬란한 태양이 원색의 대지를 비추고 저녁이면 타는 듯한 노을이 한 낮의 파란 하늘을 대신한다. 이윽고 밤이 되면 무수히 많은 별들은 하늘에서 축제를 벌인다.

*4월7일

열악한 환경에 정해진 숙소와 행선지 외에는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는 행동의 제약 때문에 모든 일정을 앞당겨 바로 초모랑마 베이스 캠프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차량을 타고 4천m대의 사람들이 띄엄 띄엄 거주하는 고원을 달려 고갯길을 오르니 팡라(5천1백20m)다. 초모랑마의 웅장한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온다. 파란 잉크를 풀어 놓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초모랑마를 감상하지만 벌써 고소증세에 정신은 어찔 어찔하다. 평지에 50%밖에 안 되는 산소. 아직도 고소적응이 안된 탓이다. 1시간 여를 달리니 베이스 캠프다. 그래도 지금까지 지나 온 길은 푸른 흙이라도 보였지만 이 곳 베이스 캠프는 그야말로 자갈들의 무덤이다. 그나마 이미 베이스 캠프에 들어온 원정대들이 세워 놓은 텐트가 황량한 벌판을 원색으로 채색해 준다.

저마다 식당, 주방, 화장실, 샤워장 텐트와 개인용 텐트를 세우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나 고소증에 시달리다 보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고소 적응이 안 된 상황에서 오랜 시간 희박한 공기 속에 있다 보면 마취 상태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근육은 마비되고 의식은 흐릿해 지고 산소 부족으로 인해 거친 숨을 몰아 쉬는 동안 내 의지는 사라져 버린다.

*4월11일

오늘은 등반이 무사히 끝나기를 기원하는 라마제가 열렸다. 베이스 캠프에 온 후로 지난 4일간은 나의 삶에서 영원히 삭제된 날들이다. 아무 기억도 안 난다.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조차도 기억에 없다. 여전히 정신은 어디다 빼 놓은 듯 멍한 상태에서 시간을 보낸다. 겨우 몸을 추수리고 라마제에 참가해 뒤에서 절을 한 번하고는 롱북 롯지가 있는-베이스 캠프에서 걸어서 3시간- 곳까지 티베트인 키친 보이의 오토바이로 다시 내려간다. 이 곳에서 이틀을 보낸다. 롯지 뒤 편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큰 규모의 롱북 호텔이 있다.

아무 것도 입에 들어오질 않는다. 게다가 이 곳은 낮에는 따가운 직사광선에 기온이 영상 10여도까지 올라가지만 밤에는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진다. 첫날 밤, 가져 온 침낭도 꺼내지 못하고 얇은 이불을 덮은 채 잠을 잤더니 양 발가락이 피가 통하지 않는데다 탈장증세를 보여 베이스 캠프 생활내내 고생을 했다.

원정 경험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에-그 동안 산악인 엄홍길(45, 트렉스타)씨와 안나푸르나(1999), 칸첸중가, K2(이상 2000) 등 세 번의 원정을 다녀왔다-밤새 끙끙 앓면서 ‘내가 왜 왔나. 취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카투만두로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기만 하다.

*4월13일

이틀동안 가져간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 1986년 히말라야 8000m 고봉 14좌를 최초로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극한 상황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아니다. 극한 상황은 또 다른 현실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줄 뿐이다. 그것은 평소 내 안에서 잠자고 있는 어떤 의식의 상태를 일깨워 주는 열쇠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나의 한계 상황에서 삶의 또 다른 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도 고소 적응이 어느 정도는 된 듯 싶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짐을 싼다. 마차를 빌려 1시간30분 동안 자갈길을 달려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는 모든 것이 CTMA의 허가에 의해 이뤄진다. 마차를 빌리는 것도 이들에게 60위안(한화 약 8천4백원)을 지불해야 한다.

베이스 캠프에 도착하니 마침 휴먼원정대의 엄홍길 등반대장과 고소 캠프에서 사용할 야크 60마리 분(약 3톤)의 식량, 장비, 그리고 일부 대원과 셰르파 들이 ABC(전진 베이스 캠프, 6천3백m)로 올라가려고 한다. 그래도 말이 통하는 대원들이 있는 곳에 다시 오니 기분은 오히려 좋아진다. 엄대장의 ‘형, 괜챦냐’는 말 한마디에 기운을 차린다.

그리고 ‘이들은 한번 위로 올라가면 희박한 공기 속에서 자연과 싸우고 순응하며 보름이고 3주일이고 머물다 내려 올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내 자신의 흐트러진 정신력을 다시 한번 추수린다.

*4월20일

그 동안 잃었던 입맛이 다시 돌아왔다. 마침내 고소에 완전히 적응됐다는 이야기다. 비록 산소는 적지만 입에 담배도 다시 물어본다.

베이스 캠프 생활

베이스 캠프에는 4~10명 정도의 대원들이 상주한다. 나머지 대원들은 ABC에서 활동하며 고소 적응이 잘 안 되는 대원들은 베이스 캠프와 ABC를 오르내린다. 이번 원정은 규모가 커서 보도진을 포함한 대원이 17명, 셰르파 18명, 그리고 쿡과 6명의 키친보이가 있다. 그 중 ABC에는 일부 대원과 셰르파 전원, 그리고 한식과 네팔식을 담당하는 키친보이 네 명이 올라가 있다.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되는 베이스 캠프의 생활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그 많은 시간을 계획있게 보낼 것인가는 다분히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그래서 베이스 캠프에는 장기, 바둑, 체스 등 다양한 오락거리와 각자 준비한 책들이 마련돼 있다. 그리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DVD로 오후 11시 정도까지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렇지 않으면 기나 긴 밤을 보낼 수가 없다. 텐트로 만든 샤워장에서는 가끔씩 머리를 감고 자그마한 빨래들을 한다.

이 곳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환경 문제. 네팔에서는 쓰레기 문제로 골머리를 앓자 1996년 원정대에 등반 요금 이외에 4천달러씩의 쓰레기 예치금을 받고 있다. 그 돈은 등반대가 미리 정해진 양의 쓰레기를 남체나 카투만두로 되돌려 놓아야만 환불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티베트에서는 쓰레기 수거차가 베이스 캠프의 원정대 텐트를 돌면서 돈을 받고 쓰레기를 수거한다. 그리고 화장실의 분뇨는 꽉 차면 똥장군이 텐트를 돌면서 돈을 받고 수거해 간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도 에베레스트를 중심으로 적용되고 있지 다른 8000m 산에서는 아직도 시행되고 있질 않다.

초모랑마 베이스 캠프는 유일하게 차량 진입이 가능해 베이스 캠프 입구에 있는 상점에 연락을 하면 육류나 신선한 야채를 손쉽게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식수원은 넓은 연못을 이루고 있는 빙하를 깨고 물을 받아 사용하기 때문에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식사는 주, 부식을 많이 가져 가고 한국음식을 꽤 잘 하는 쿡이 있지만 집에서 먹는 음식만은 못하다. 장기간 베이스 캠프 생활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입맛을 잃을 수가 있다. 그리고 한번 원정을 다녀 오면 많은 대원들이 약 두 달간 10kg 가까이 체중이 감소되는 것이 특징이다.

일정대로라면 벌써 원정도 반이 지났다. 그러나 위에서의 활동은 예상보다 약 열흘 이상이 빠르다. 그 동안의 원정경험에 비추어 볼 때 히말라야에서의 활동은 일정표에 따라 이뤄지지 않는다. 가급적 날씨가 좋을 때 최대한의 캠프를 설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초모랑마 정상을 오르는데 꼭 거쳐야 하는 노스 콜(7천1백m)은 아수라장이다.

22개 팀이 들어 온 올 봄 시즌 초모랑마에는 2백35명의 대원과 셰르파, 쿡을 포함한 보조 인원이 1백76 명으로 모두 4백 여 명의 인원이 밀집해 있다. 현재 대부분의 대원과 셰르파들은 ABC(전진 베이스 캠프, 6천3백m)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나마 ABC 지역은 넓은 빙하 지대라 텐트를 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지만 노스 콜부터는 절대적으로 부족해 각 원정대 마다 미리 자리를 선점하느라 안간 힘이다.

그러다 보니 노스 콜은 등반도 하기 전부터 각 팀마다 셰르파를 올려 보내 말뚝을 박고 로프로 줄을 치고 텐트 한 동만 덩그러니 세운 상태에서 자기 영역을 표시하는 등 가관이 아니다. 휴먼원정대도 셰르파를 올려보내 10동의 텐트를 치고 계속해서 식량과 장비를 올려 보낸 상태다.

이 곳의 날씨는 좋다가도 며칠씩 눈보라에 발이 묶일 수 있기 때문이다. 원정대도 계획을 수정해 4월24일까지 마지막 캠프(8천3백m)를 설치하고 3일간 ABC에서 휴식을 취한 후 기상이 좋다면 5월1일을 전후해 8천7백50m에서 시신을 수습할 예정이다.

10여일 째 베이스 캠프 생활을 하다 보니 위성전화를 통해 가끔씩 인터넷으로 세상 소식을 듣는다. 황량한 산중에서 시간을 보내다 문명의 불빛으로 밝은 인간의 세계를 보면, 이를 데 없이 멀고 먼 길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나를 인류로 부터 떼어놓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휴먼 원정대는 ‘인간이 이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이루려고 해도 이루지 못하는 그 목표’를 향해 자그마한 걸음을 떼고 있다.

초모랑마 베이스 캠프=김세준 중앙 m&b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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