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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홍백전과 K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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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이번 주 한국 인터넷 언론들은 일본 NHK가 올해 연말 음악방송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이하 홍백전)’에 한국 가수들을 출전시키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보도했다. 독도 문제 등에 대한 일본인의 반감이 이유다. 하지만 보도에서 인용한 석간 후지의 기사를 자세히 읽어 보면 NHK의 입장은 아직 밝혀진 게 없다. 문제가 된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에게 사과를 요구한 발언의 영향이 크다. (한국에는) ‘독도는 우리 것’이라고 소리 높여 말하는 바보 같은 한류 탤런트가 많다”는 말을 한 사람은 익명의 프로덕션 간부일 뿐. 냉각된 한·일 관계를 이용한 ‘낚시기사’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추측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재 한·일 관계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를 실감할 수 있다. 6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홍백전은 한 해 동안 일본인들에게 사랑받은 가수들이 총출동하는 상징적인 무대다. 2002년 ‘K팝 한류 1호’ 보아의 출전 이래 10여 년간 거의 매해 한국 가수들이 출연했다. 2010년 출연자 명단에서 K팝 가수들이 빠지자 팬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졌고 지난해에는 동방신기와 카라, 소녀시대까지 무려 3팀이 초청됐다.

한류스타 ‘동방신기’. 홍백전에 3회 출연했다

 외교관계 악화가 미친 영향을 제외하더라도 일본에서의 K팝 열풍은 올해 들어 한풀 꺾였다. 지난 5일자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K팝 그룹의 데뷔작 첫 주 판매량은 지난해 약 3만7000장에서 올해는 약 1만8000장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하지만 이런 추세와는 별도로 동방신기가 7월 일본에서 발표한 싱글 ‘안드로이드’가 외국 가수 싱글 최다판매량 기록을 세우는 등 K팝 선두 주자들의 인기는 굳건하다. 주간지 여성세븐의 조사에 따르면 외교관계 악화 후 한류팬의 약 10%만이 “한류팬을 그만두겠다”고 답했다 한다.

 정치와 문화는 별개로 다뤄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 둘은 별개가 될 수 없다. 양국의 정치적 갈등은 당연히 문화 수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긴장과 마찰을 반복해 왔으며 앞으로도 반복해 갈 것이 분명한 한·일 관계에서 문화 교류만큼은 최소한의 우호적 영역으로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요즘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 때문에 중국에 사는 일본인들이 말끝에 ‘하무니다(합니다)’를 붙이며 한국인 행세를 한다는 뉴스도 나온다. 유럽 여행 중 지하철 표 끊는 법을 몰라 ‘민폐녀’가 됐을 때 “스미마셍” 하며 일본인인 척한 경험, 내게도 있다. 어쨌든 위기상황에선 이렇게 서로 신세(?)를 지고 살아야 하는 관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