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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우리 노후를 정치바람에 맡길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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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철호
논설위원

해외여행을 할 때 들르는 랜드마크 건물이 있다. 독일 베를린의 명물인 소니센터, 그 주인은 바로 우리 국민연금이다. 영국 런던의 금융 본산인 HSBC빌딩도 국민연금이 사들였다. 이뿐이 아니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상징인 햄슬리빌딩과 호주 시드니의 알짜 부동산인 ‘오로라 플레이스’도 국민연금이 손에 넣었다. 그러면 국민연금은 누구 것일까. 바로 우리 국민이다. 우리 모두의 노후가 국민연금에 달려 있다.

 하지만 우쭐댈 게 아니다. 현재 364조원인 국민연금 적립액은 2040년에 2000조원을 돌파한다. 문제는 수익률이다. 수익률이 1%포인트 떨어지면 연금 고갈 시기가 5년이나 앞당겨진다. 현재 국민연금은 자산의 60% 이상을 국채에 묻어두고 있다. 하지만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3% 초반이며, 지난주 30년짜리 국채는 3.05~3.08%에 동났다. 이대로 저성장-저금리 추세가 굳어지면 우리 노후도 불안해진다.

 요즘 정치권은 대선을 앞두고 ‘연기금 의결권 강화’를 합창하고 있다. 사외이사 추천, 대표소송 제기를 의무화한 국민연금법 개정안도 상정돼 있다. 거센 경제민주화 바람을 감안하면 의결권 강화는 시간 문제로 보인다. 이미 국민연금의 지분이 5% 이상인 상장사가 삼성전자·현대차 등 190여 개에 이르고, 포스코·하이닉스·KT·KB금융의 최대주주가 국민연금이다. 정치권이 재벌을 때리려면 연기금 동원의 유혹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눈을 바깥으로 돌리면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 국민연금은 위험부담을 안더라도 해외 대체투자에 나설 수밖에 없다. 수익률을 높이려면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국민연금은 소니센터와 HSBC 건물 등을 세일 앤 리스백(sale and leaseback·매각 후 재임대) 방식으로 사들여 연6~7%의 안정적인 임대료를 받고 있다. 이런 해외 대체투자에서 지난해 국민연금이 거둔 수익률은 자그마치 12%에 이른다. 우물 안의 국내 채권에만 목을 맸다면 상상할 수 없는 수치다.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국민연금이 매입한 미국 콜로니얼 파이프라인과 영국의 개트윅 공항이다. 콜로니얼 파이프라인은 미국 석유류 제품의 17%를 운반하는 1위 업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6%대 후반의 배당과 함께 지분 가치도 크게 올랐다. 만성 적자였던 개트윅 공항은 런던 올림픽 특수에 힘입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했다. 오죽하면 로런스 서머스(전 미국 재무부장관) 하버드대 교수조차 “국민연금은 현재 16% 남짓한 해외투자 비중을 50%까지 끌어올리라”라고 주문할까.

 최근 미국·유럽에는 ‘투자보호주의’의 바람이 거세다. 특히 공항·항만·정유 등에 외국인이 얼씬거리는 것에 기겁한다. 가장 큰 경계 대상은 시장 논리보다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우선하는 국부펀드다. 미 의회는 아랍에미리트(UAE)의 미국 컨테이너 터미널 매입, 중국의 미 통신보안업체 스리콤 인수에 줄줄이 퇴짜를 놓았다. 뉴질랜드도 캐나다 연금펀드가 오클랜드 공항을 삼키는 것을 막았다. 그나마 국민연금이 비교적 독립적인 투자가로 인정받았기에 석유 파이프·공항 등을 거머쥘 수 있었다.

 지금도 국민연금 운용위원회는 보건복지부 소속이다. 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이고, 경제부처 차관들이 대거 참여한다. 앞으로 정치권의 간섭으로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일일이 개입하거나 재벌 때리기의 최전선에 나선다면 세계시장에 어떻게 비칠까. 알짜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에 발목이 잡힐 수 있다. 전략산업 진출에는 번번이 퇴짜를 맞을지 모른다. 정치권은 국민연금이 그동안 왜 섀도 보팅(다른 주주들의 찬성과 반대표 비율만큼 자신의 의결권을 분리)에 치중해 왔는지 헤아려야 한다.

 정치권이 진정 미래를 고민한다면 국민연금의 ‘저(低)부담-고(高)지급’ 구조부터 고칠 일이다. 이런 쓴 약은 마다하고 당장 유권자들의 속을 후련하게 한답시고 연기금을 함부로 줄 게 아니다. 국민연금을 알차게 키우려면 지금보다 훨씬 투명하고 독립적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기금 운영도 전문가들에게 맡길 일이다. 국민연금의 주인은 정부도, 정치권도 아니다. 우리 모두의 노후가 정치바람에 흔들리는 게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