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커비전] 되살아난 '첫 경기 망령'

중앙일보

입력

'첫 경기는 어렵다' 라는 징크스가 재현된 최악의 경기였다. 한국 축구는 월드컵.올림픽 등 국제경기 때 첫 경기를 망치는 '망령' 에 시달리는 고질적인 아픔을 앓고 있다.

왜 첫 경기마다 죽을 쓸까. 심적 부담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당시 한국대표팀을 이끌었던 세계적인 명장 크라머 감독은 축구의 경기력은 기술.전술.체력의 병합작품이라고 설파했다.

최근 들어서는 크라머의 주장에 보태어 심리적 요인이 강조된다. 아무리 체력이나 기술, 전술적인 준비가 완벽하다 해도 경기 당일 선수들이 심리적으로 불안해 기량을 펼치지 못한다면 경기는 형편없이 꼬인다.

프랑스에 대패한 한국의 가장 큰 패인은 바로 심리적 요인의 트러블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심리적으로 불안감에 휩싸였고 급속하게 얼어붙었다.

특히 수비수의 어이없는 패스 미스로 인해 첫골을 손쉽게 내준 뒤 신경계의 반응.작용이 정상이 아니었다. 이는 선수들의 움직임과 경기 운영 능력에 악영향을 끼쳤고 팀 플레이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또 전술의 틀인 포메이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4-5-1 형태로 허리를 두텁게 하는 전술적 틀을 짰으나 미드필드 플레이는 저조했다. 선수간 콤비네이션.패스워크.유기적인 포지션 체인지 등 기대했던 전술이 살아나지 않았다.

자연히 최전방에 위치한 설기현도 흔들렸다. 전반 45분 동안 볼 컨트롤이나 자신에게 온 볼을 키핑해 주는 플레이에 난조를 보이며 상대 수비수들을 편안케(□)해주는 부진함을 보였다. 다른 선수들의 경기 또한 평균점 이하의 낙제점이었다.

경기 직전 "첫 경기는 어렵다. 그래서 무승부가 많이 나온다" 며 부담감을 피력했던 르메르 프랑스 감독을 편안케 해준 것은 바로 한국이 실점한 다섯골 중 첫골이었다. 이 골은 프랑스에 원정경기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 요인을 씻게 해준 한국의 최대 실수였다.

한국의 대패에는 심리적 요인 외에도 프랑스 전에 대비한 전략적인 미스도 한몫했다.

한국은 크라머가 주장했던 기술.체력.전술에서 프랑스에 비해 떨어진다. 따라서 한국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야 했다.

즉 프랑스가 오랜 비행시간과 시차, 이에 따른 피로 문제를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전술적 준비를 했어야 했다.

프랑스의 약점은 후반전에 체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한국이 전반전보다 후반전에 다소 활기찬 경기를 한 것은 프랑스의 체력이 저하했기 때문이다.

전술적으로 전반에는 수비에 중점을 둬 첫 골의 실점을 막고 승부를 후반에 걸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90분 동안 프랑스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닌 셈이 됐다.

지단.앙리.튀랑.트레제게 등 월드 스타들이 빠지기는 했지만 패스의 타이밍, 빈 공간으로 침투하며 찬스를 엮어내는 전술적 운용 능력, 수세 때 완벽한 밸런스를 유지한 프랑스의 플레이는 시종 한국 축구를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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