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선행학습 조장은 공교육의 직무유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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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초·중·고교생들이 짧게는 한 학기, 길게는 몇 년을 앞당겨 미리 공부하는 것을 선행학습이라고 한다. 다음 시간 또는 다다음 시간에 학습할 내용을 미리 공부하는 예습과는 차원이 다르다. 학원들의 대표적인 장사 마케팅이 바로 초등학교 고학년 때 중·고교 과정을 끝내는 선행학습이다. 어려운 내용을 가르쳐 아이들의 기를 죽이고, 계속 학원에 눌러앉도록 하는 수법이다. 그런데 이런 선행학습을 해야 풀 수 있는 수학 문제가 지난 학기 서울시내 일부 학교에서 나왔다고 한다. 서울시교육청은 학년별 교육과정에서 벗어난 수학 문제를 낸 39곳을 적발했다.

 학교가 선행학습 또는 선행출제를 한다는 건 모든 학생이 현재 배워야 할 내용을 이미 다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학교는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면서 이미 다 배웠으니 앞선 내용을 가르치고, 시험도 내는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어려운 문제를 내는 학교가 실력이 있는 학교라고 생각한다면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히려 선행학습 또는 선행출제 행위는 교사의 태만, 공교육의 직무유기를 전제로 한다.

 학생들은 제 학년과 제 수준에 맞게 배울 권리가 있다. 이는 선택형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제도 취지에도 걸맞다. 선행학습은 결국 학생의 이런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다. 또한 선행학습의 2차 피해자는 교사이기도 하다. 몇 년치를 앞서 배운 학생이 학교 수업에 무슨 흥미를 갖고 참여하겠는가. 이런 심드렁한 학생들에게서 교사는 끊임없이 사교육과 비교당하고, 비웃음을 살 것이기에 선행학습은 학교교육을 피폐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란 시민단체가 최근 선행교육 금지법을 제정하자는 운동을 하고 있을 정도로 그 폐해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교육당국은 법 제정 여부와 관계없이 교육과정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지 학교에 대한 감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선행교육의 빌미가 되는 고교 입시 또는 대학 입시 내용도 점검 대상이다. 최소한 공교육에서 사교육을 부추기는 요인은 없는지 살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