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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바둑이야기-‘반상 위의 야전사령관’ 서봉수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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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거리에서 배운 바둑으로 세계를 제패한 서봉수란 존재는 한국 바둑사를 장식하는 귀중한 자산이다. 서봉수는 일본 유학파 들이 휩쓸던 시대에 ‘토종’으로는 처음 정상에 올랐고 실전 중심의 그의 바둑관과 잡초적 생명력은 훗날 세계를 풍미한 ‘한국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 자신이 하나의 ‘돌’임을 터득한 사람

바둑은 어떤 스포츠와 비슷할까. 권투처럼 바둑에도 ‘아웃복싱’과 ‘인파이팅’이 있다. 탁구처럼 ‘전진 속공’이 있는가 하면 여자 국가대표 김경아 선수 같은 수비 전문 플레이도 있다. 바둑은 골프처럼 강약의 조절이 전술의 핵심이고 축구처럼 골 결정력이 절실히 요구되며 야구처럼 마무리를 잘해야 승리의 점수를 지켜낼 수 있다. 바둑은 2009년 2월 대한체육회에 가맹하면서 ‘스포츠’가 됐다. 바둑은 앞서 열거한 대로 스포츠의 온갖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바둑’ 하면 떠오르는 스포츠의 이미지는 희미하다. 왜일까. 바둑은 다름 아닌 ‘전쟁’을 닮았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서도 미사일이 오고 가는 현대 전쟁이 아니라 병사들이 직접 움직이는 구식 전쟁을 닮았다. 장막 안에서 천리를 내다보는 손자 병법 시대의 전쟁을 그대로 닮았다. 바로 이 대목에 바둑의 매력과 바둑의 난해함과 바둑의 깊이가 담겨 있다. 바둑이 고대로부터 ‘만 가지 게임의 왕’이 된 이유다.

 왜 이런 얘기부터 꺼내는가 하면 서봉수 9단의 별명이 ‘야전사령관’이기 때문이다. 한국 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9단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6·25전쟁에 병사로 참전했던 경험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기사(棋士)로서 바둑판 위에선 돌을 주무르는 장수와 같은 존재였는데 막상 전쟁터에 나와 보니 사석(捨石: 버림 돌)이나 폐석(廢石: 용도가 끝난 돌)이 될 수도 있는 수많은 돌 중 하나에 불과했다.”

 서봉수는 전쟁터엔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방위 출신이지만 자신이 하나의 ‘돌’임을 생래적으로 터득한 사람이다. 그의 수줍음과 과도한 허리 낮추기,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 토종의 된장 냄새, 지식을 뛰어넘는 본능과 직관, 잡초의 생명력 등은 모두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이것들이 서봉수의 ‘실전적 기풍’과 어울려 야전사령관이란 별명을 만들어냈다. 서봉수 9단 본인도 이 별명을 좋아한다. 탁상 머리에 앉은 사령관이 아닌, 바람 부는 전쟁터에서 먹고 자며 말을 달리는 야전사령관….

● 거리의 강자 모조리 쓰러뜨린 까까머리 서봉수

한국바둑의 대부 조남철 8단의 20년 아성이 혜성처럼 등장한 서봉수 2단에 의해 무너졌다. 사진은 서봉수(오른쪽)가 조남철을 3대1로 꺾은 1972년 명인전 도전기 4국. [중앙포토]

서봉수는 1953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서봉수의 큰형은 80년대 대전 일대를 주름잡던 유명한 ‘주먹’이었다.) 공부를 싫어해서 학교는 거의 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계산도 느린 편이고 수학에 특별한 적성을 보인 적도 없다. 출석 미달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장도 어머니가 학교에 가 통사정해 받았다고 한다. 13세 때인가. 아버지가 다니던 영등포 시장통의 어느 기원에서 우연히 바둑을 배웠는데 이때부터 바둑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서봉수를 보면 ‘운명’이란 두 글자가 떠오른다. 프로기사로 대성하려면 7~9세 때는 바둑을 배워야 하고 11~13세쯤엔 프로 입단을 해내야 한다. 최소한 15세 이전엔 프로가 돼야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조훈현은 5세 때 바둑을 배웠고 9세에 프로가 됐다. 일본에서 최고의 스승들에게 배웠다. 이창호는 8세에 바둑을 배웠고 조훈현의 제자가 되어 11세에 프로가 됐다. 이세돌은 권갑룡 도장에서 바둑을 공부해 12세에 프로가 됐다. 이에 비하면 서봉수는 너무도 늦게 바둑을 배운 셈이다. 선생도 따로 없었다. 서봉수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고(대방동에서 어머니와 셋방살이를 했다) 그래서 성공의 또 하나의 필수조건인 ‘좋은 선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기재(棋才)는 출중했다. 서봉수는 대성의 3대 요소 중 좋은 선생과 빠른 입문은 구비하지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그는 바둑 책이나 옛 고수들의 명국 기보를 거의 공부하지 않았다. 대신 길거리 기원에서 짜장면 내기를 하거나 어른들이 주선한 내기바둑을 두며 살았다. 내기바둑의 강자들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까까머리 서봉수에게 추풍낙엽으로 떨어져 나갔다. 다음에 만나면 더 강해져 있었다.

 내기바둑은 프로를 지망하는 소년들에겐 금기와 같다. 내기바둑을 두면 승부에 지나치게 연연하여 시야도 좁아지고 바둑을 망친다는 게 바둑세계의 오랜 통념이다. 조훈현 9단이 일본에서 수업시절 딱 한 번 선배 프로기사와 100엔짜리 내기바둑을 두었다가 스승 세고에 겐사쿠 9단으로부터 파문까지 당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구나 서봉수는 내기바둑이 생계와도 밀접한 의미를 띠고 있어서 승부에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고 이론대로라면 그의 바둑은 꽁꽁 굳은 하급의 바둑으로 전락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서봉수는 실전의 가혹함 속에서 본능적으로 ‘생존’을 배웠고 자기 나름의 독특한 승부호흡, 즉 실전적 직관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서봉수는 훗날 ‘야생의 표범’으로 불리고 ‘실전의 대가’라는 칭호를 거쳐 ‘야전사령관’에 이르게 된다. 그 원동력 속엔 이 시절의 헝그리 정신과 함께 내기바둑 특유의 실전감각이 녹아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잠시 이야기가 옆으로 가지만 1960년대 일본의 전설적 강자 사카다 에이오 9단은 어린 시절 부친이 내기바둑으로 잃은 재산을 내기바둑으로 되찾아온 일화를 갖고 있다. 그 역시 화려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실전적 기풍’으로 전성기 일본 바둑을 완벽하게 제패했다. 또 프로 초단이 된 뒤 미국으로 이민 가 포커의 대가가 된 차민수 4단은 어느 날 느닷없이 미국대표로 후지쓰배 세계대회에 참가한다. 그리고 조치훈 9단까지 꺾고 세계 8강에 오른다. 깜짝 놀란 일본 사람들 앞에서 그는 “포커만 했지만 바둑이 늘었다. 안목과 승부호흡의 문제에서 모든 승부는 동일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내기바둑이든 그 무엇이든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 3승1패로 명인 타이틀 … 신문 1면 장식

서봉수는 1970년 9월 입단대회를 통과해 프로 초단이 된다. 17년7개월이니까 늦은 나이다. 첫해에 4승2패. 신예로서는 주목받기 힘든 그저 그런 성적표였다. 대방동에서 버스표 두 장과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짜장면 한 그릇 값을 들고 종로 관철동 한국기원까지 출퇴근하는 새로운 일상이 시작됐다. 그리고 71년 4월 제4회 명인전이 열렸다. ‘서봉수=명인’이란 등식을 만들어낸 바둑사에 남을 드라마틱한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예선을 5연승으로 통과한 서봉수는 이 무렵 하루아침에 바둑의 묘리를 터득한 사람처럼 연승가도를 달렸다. 승단대회서 전승하여 연말엔 2단이 됐고 조남철 1인 독주시대를 마감시킨 당대의 최강자 김인 7단(당시)마저 꺾고 명인전 도전자가 됐다. 명인 타이틀 보유자는 다름 아닌 50세의 조남철 8단(당시)이었다. 비록 6년 전 김인에게 국수 타이틀을 내주며 1인자의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이때까지 그는 무려 20년간 한국 바둑의 절대 강자였다. 비록 이제 50세의 장년이 되었다고는 하나 갓 입단한 서봉수가 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승부는 그러나 의외로 쉽게 끝났다. 첫 판을 불계로 이긴 서봉수는 2대1로 리드한 가운데 열린 제4국(72년 5월)에서 불과 176수 만에 불계승을 거두며 3승1패로 타이틀을 따냈다. ‘단=실력’이던 시대였다. 일본 유학을 하지 않은 기사는 타이틀의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조남철,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 등 예전의 타이틀 보유자는 모두 일본유학파였다). 한데 일본 유학도 하지 않은 데다 입단한 지 1년8개월밖에 되지 않은 19세 무명 기사가 한국 바둑의 태산 조남철 8단을 꺾으며 우승한 것은 당시만 해도 진정 놀라운 사건이었다. 당시 주최사(한국일보)는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1면 기사로 대문짝만 하게 실었고 주간지에도 서봉수가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조남철은 이로써 마지막 타이틀을 잃으며 승부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된다. 서봉수는 19세에 우승컵을 따내 ‘최연소 타이틀 획득’의 기록을 세웠고 동시에 최저단(2단) 타이틀 획득 기록에다 입단 후 최단기간 내 타이틀 획득 기록도 세우게 된다. 최연소 기록은 훗날 이창호에 의해 깨졌지만 나머지 두 개의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남아있다.

 서봉수는 그러나 ‘밑천’이 짧았다. 조훈현이 후지사와 슈코 같은 훌륭한 스승 아래서 연구를 하고 그 옛날 본인방 가의 명국에서부터 우칭위안, 기타니, 사카다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명국을 섭렵하며 팁바둑을 충실히 다진 것과 달리 서봉수는 ‘실전’이 스승이었고 거기서 터득한 동물적인 승부감각과 끈질긴 생존력이 전부였다. 서봉수는 이제 막 정글에 발을 디딘 새끼 표범이었다. 명인이 되었건만 약한 상대에게도 자주 졌다. “서봉수의 명인은 우연”이란 소리도 나왔다. 필생의 적수가 될 ‘조훈현’이란 청년이 아직 일본에 머물며 현해탄을 건너오지 않았을 때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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