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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북 디자인 토대 만든 ‘펭귄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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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호 27면

여러 면에서 이슈가 되었던 2012 런던 올림픽 개·폐막식. 영국 문화가 한곳에 집결했지만 선보이지 않았던 영국의 숨겨진 콘텐트가 하나 있다. 바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영국의 펭귄 출판사와 이곳의 디자인이다.펭귄은 1935년 앨런 레인이 설립한 출판사다. 양질의 콘텐트를 값싸게 제공하겠다는 레인의 작은 바람이 발단이었다. 오늘날 펭귄이 누리고 있는 명성은 펭귄을 거쳐간 북디자이너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1940년대 펭귄 문고판을 현대적 감수성으로 디자인한 얀 치홀트를 시작으로 제르마노 파셰티, 로멕 마버, 데릭 버솔(작은 사진), 데이비드 펠헴 그리고 최근엔 젊은 데이비드 피어슨까지 역량 있는 디자이너들이 이 출판사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나갔다. 이 중 1934년생인 데릭 버솔은 영국의 북디자이너로서 60년대와 70년대 펭귄 단행본 디자인 작업이 대표적이다. 잡지 ‘노바’ ‘트웬’ ‘타운’ 등도 디자인한 그는 영국 북디자인계의 거장이다. 2005년에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디자인 상인 프린스 필립 디자인 상을 받기도 했다.

시대를 비추는 북디자인 ⑥ 데릭 버솔

버솔은 펭귄을 거쳐간 여러 북디자이너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펭귄은 새로운 디자이너들을 고용해 꾸준히 변신하고 있다. 하지만 버솔이 진행한 펭귄 디자인은 시간의 무게 앞에서도 굳건히 버티고 있다. 어쩌면 버솔은 아트디렉팅 시스템이 자리 잡은 펭귄 출판사 체제 속에서 가장 부드럽게 호응할 수 있었던 디자이너였는지도 모른다.일찍이 미술 재능을 인정받아 15세에 웨이크필드 미술학교에 진학했던 그에게 어렸을 적 영감의 놀이터는 문구점이었다. 각종 필기도구들, 잉크와 종이에 둘러싸였던 어린 버솔은 이후 미술학교에서는 직접 인쇄기를 구입해 쓸 정도로 인쇄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였다. 그리고 진학한 센트럴 스쿨 오브 아트 앤 디자인에서 버솔은 영국의 모더니즘 디자인의 장을 열어 나간 앤서니 프로쇼그와 허버트 스펜서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런 그가 북디자이너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였다. 데릭 버솔은 어린 시절부터 ‘펭귄광’이었다. 키프로스에서 군복무를 할 때였다. 그의 부인 셜리는 그에게 매달 펭귄에서 나오는 책을 소개하는 ‘월간 펭귄 회보’를 보냈다. 그러면 회보에서 읽고 싶은 책을 표시해 아내에게 반송하고 다음 달 바로 책을 받아보곤 했다. 군복무 이후인 1960년,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펭귄 출판사의 아트디렉터였던 존 커티스로부터 펭귄 단행본 디자인 의뢰를 받은 것이다. 버솔이 북디자이너로서 펭귄과 맺은 첫 인연이었다.

이후 펭귄 출판사의 소설 부문 아트디렉터 데비이드 펠헴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버솔은 일련의 소설 시리즈를 디자인하게 된다. 소설가 존 업다이크 시리즈는 그가 펠헴으로부터 의뢰받은 첫 작업이었다. 버솔은 마이클 포어맨에게 업다이크의 초상화를 의뢰했고, 이에 맞춰 타이프라이터 서체를 표지에 배치했다. 선화와 타이프라이터 서체가 좋은 궁합을 이룬 표지 디자인이었다. (그림 1) 이어진 또 다른 소설책 디자인은 서머싯 몸의 24권짜리 선집. 버솔은 몸의 소설들이 대부분 에드워드 시절을 배경으로 엇비슷한 주제들을 다룬다는 데 착안해 디자인을 했다. 그는 당대의 소품들을 수집하고 있었던 사진가 해리 페치노티에게 연락했다. 축음기 바늘부터 여성 누드 엽서까지 몸의 소설에 어울릴 만한 소품들을 선별해 사진 촬영을 진행했다. 완성된 표지 디자인은 24권의 표지들을 하나의 사진으로 연결한 형태다. (그림 3)

그리고 버솔의 71년도 펭귄 교육 총서 리디자인도 펭귄 역사에 오래 남을 작업으로 꼽힌다. 언제나처럼 펠헴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에는 전체 작업을 총괄하는 작업을 의뢰했다. 기존 펭귄 교육 총서를 리디자인하는 작업에 착수한 버솔은 낱권으로서의 시각적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굵직한 레일로드 고딕 서체를 기반으로 디자인을 전개했다. 여기에 그는 자신의 스승인 앤서니 프로소그 등을 참여시키면서 총 200권에 이르는 펭귄 교육 총서 아트디렉팅을 완성하게 된다. (그림 4)

그의 2004년 저서 '북디자인에 관한 노트'에 수록된 그의 작업들을 보면 별다른 장식 없이 디자인의 가장 기본인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에 충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풍부한 화이트스페이스(여백)가 기본이며, 예상되는 곳에 언제나 등장하는 페이지 번호와 안정감 있는 서체 운영 등이 특징이다. 그의 북디자인은 화려한 장미보다는 소박한 백합에 가깝다.
버솔이 자신이 가장 아끼는 펭귄 디자인 표지로 꼽은 사르트르의 (1967)을 보면 이런 그의 디자인 철학이 잘 드러난다. (그림 2) 그는 말한다. “내가 왜 이 표지를 좋아하냐고요? 이유는 그림이 필요하지 않는 표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를 말해주기 때문이죠. 제목은 ‘말’이고, 책의 첫 문장이 모든 걸 말해줘요. 그 밖에 다른 건 그래픽과 타이포그래피에 함축적으로 표현됐죠.”

오래 살려면 소식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소식(小食)하는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주는 데릭 버솔. 버솔은 더 이상 펭귄 책들을 디자인하지 않지만 그가 세워 놓은 펭귄 북디자인의 역사는 오늘의 펭귄이 여전히 지속적으로 변화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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