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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 농구냐" 女야구, 한·일전 대패했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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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사진 1] 마운드가 뭔지도 모르던 여성들이 명품백보다 글러브를 더 좋아하는 야구선수가 됐다. 선수들은 흙먼지와 땀냄새 가득한 얼굴로 “야구가 본업인지 부업인지 모르겠다” 며 웃는다. 왼쪽부터 고양 레이커스 유경희(32)?박향주(44) 선수, 구리 나인빅스 조명희(29) 선수, 고양 레이커스 박세미(25)·조정화(36) 선수. [김도훈 기자]
[사진 2~5] 치고 던지고 뛴다.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던 지난 19일 서울 서대문 홍은중학교에서 구리 나인빅스(NineVics)와 고양 레이커스(Lakers)의 경기가 열렸다. 결과는 5대 5 무승부.

53-0 콜드게임 패배

 2004년 7월 일본에서 열린 제 4회 세계 여자야구대회에 당시 한·일전 성적이다. 야구팀이라곤 국내 여자야구선수 1호인 안향미(32)씨가 만든 ‘비밀리에’ 한 팀뿐이던 시절 ‘농구대회 성적이냐’는 비아냥을 받으며 1루 한번 못 밟아보고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이젠 얘기가 다르다. 9년이 지난 지금 한국 여자야구는 그 어느 때보다 ‘흥행’ 중이다. 한국여자야구연맹에 소속된 사회인야구단만 8월 현재 31개 팀 550여 명에 달한다. 그리고 다음 달 1일부터 국내 최초 전국리그인 ‘LG배 한국여자야구대회’가 열린다. 파우더와 립스틱 대신 글러브와 배트를 든 그들을 소개한다.

“야구 유니폼부터 벗겨주세요”

 이수미(33)씨가 응급차에서 소리 질렀다. 연습경기 중 팔을 다쳐 병원으로 실려가던 중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구급대원과 의사가 당황한 눈빛을 보였다. 반면에 함께 탄 야구부원들은 익숙한 표정으로 이씨가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이씨의 야구 생활은 8년째 ‘가족만 모르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2004년 9월. 당시 25세이던 직장인 3년 차 이수미씨는 문득 모든 게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가는 출근길도, 회사 속 내 자리도 지루하기만 했다. 하루하루가 케이블 드라마처럼 ‘재방송’만 반복하는 기분이었다. 뭔가 새로운 걸 찾아보려다 호기심에 클릭했던 ‘비밀리에 야구단 카페’가 이씨의 인생을 바꾸리라고 그땐 생각하지 못했다.

 이씨는 현재 35명의 선수가 소속된 ‘서울 비밀리에’ 야구단 감독이다. 8년째 매주 주말마다 야구장에 나가 연습하고 팀원 상태를 점검하며 경기 전략을 구상한다. 이씨의 포지션은 1루수. 주중에는 두세 번 야구연습장에 가 기초체력 운동도 하고 야구 기본기도 다진다. 이처럼 이씨의 인생은 야구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이씨와 함께 사는 부모님은 그가 야구 선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씨가 야구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팔꿈치와 어깨가 한번에 골절되면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수술과 재활을 했기 때문이다. 병원을 네 번 옮기고 네 번의 수술을 거치면서 부모님은 ‘야구’와 관련된 모든 걸 원망했다. 졸지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이씨 역시 ‘야구’를 원망했어야 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했던가. 이씨는 오히려 욕심이 생겼다. 이제 야구 손맛을 알 때쯤에 부상을 당하니 감질났다. 이씨는 재활이 끝나자마자 부모님 몰래 야구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매주 나가다 보니 어느새 팀 내 최고참이 됐고 올해부턴 감독이다.

 천륜도 어기며 이씨를 잡아끈 야구의 매력은 ‘의리’였다. 야구는 나 혼자 잘한다고 팀 성적이 올라가지 않았다. 팀워크를 강조하다 보니 자연스레 끈끈함이 생겼다. 팀원 중에는 고등학생 아들을 둔 50대 ‘언니’부터 갓 대학을 졸업한 핸드볼 선수 출신 동생도 있었다. 이씨는 이렇게 많은 여자친구가 생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친구를 얻었다. 지방 경기를 다니면서 모텔방에 서너 명씩 한 방에 모여 함께 씻으며 추억도 쌓았다. 재작년 이씨의 할머니가 급하게 수술하게 돼 수혈이 필요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도 ‘야구팀원’들이었다. 이씨는 “반나절 만에 내가 잘 모르는 다른 야구팀원들까지 30여 명이 헌혈증을 모아오거나 병원에 찾아왔다”며 “가족이 내가 야구한다는 사실을 모르니 저마다 병원에 와서 ‘등산동호회 친구’ ‘회사 동료’ 등 거짓말을 하는데 눈물을 참느라 혼이 났다”고 말했다. 이씨는 남자들의 의리 못지않은 야구 ‘언니’들의 의리가 인생의 무기가 됐다.

“나이스 피처 ! 나이스 캐처 ! ”

 앙칼진 목소리가 그라운드를 갈랐다. 지난 18일 경기도 안산의 한 야구경기장. 상대 팀은 별 말 없이 두서너 명씩 번갈아가며 담배를 피우러 다녀오는데 이 팀의 더그아웃은 쉴 틈이 없다. “예림아 빨리 뛰어”라고 코치가 소리지르면 선수 네댓 명이 코치의 말을 똑같이 반복한다. 경기 내내 “외야 집중! 앞으로!” “투아웃이니 ‘땅’ 소리 나면 무조건 뛰어!” 등등 쉴 새 없이 격려와 조언이 쏟아진다. 다음 경기를 위해 대기하던 야구팀원이 감독에게 찾아와 “경기 보고 팬이 됐다. 카페에 가입하겠다”며 말을 걸어오는 이 팀은 남자 사회인야구 리그에 정식 참여한 유일한 여성 야구팀 나인빅스(Nine Vics)다.

 나인빅스는 현재 안산해양리그에 참가한 14개 팀 중 유일한 여성 야구팀이다. 리그 순위는 현재 12위. 전적은 2승 1무 8패다. 남성 야구팀 두 팀을 이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리그 1위인 루드니스 야구단의 송은수 감독은 “솔직히 여자라 경기할 때 2진 선수들로 내보냈다가 5회까지 5대3으로 지길래 초조해 죽는 줄 알았다”고 나인빅스와의 경기를 회고했다. 송 감독은 “중간에 주전들로 선수 교체하고 죽자 살자 달려서 겨우 무승부로 게임을 끝냈다”며 기초가 잘돼 있어 배울 게 많은 팀”이라고 평가했다. 안산해양리그 심판 최동환(56)씨는 “이벤트성 남녀 경기가 아니라 정식 리그원으로 나인빅스를 받아줬다는 것은 그만큼 여자 사회인야구가 격상됐다는 걸 의미한다”며 “근력을 키우고 기술이 좋아진다면 남성팀 못지않은 야구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나인빅스는 38명의 선수가 소속된 국내 최대 여성 사회인야구팀으로, 이번 한국여자야구대회의 강력한 우승 후보다. 2004년 창단됐으며 신입들을 위한 자체 교육 자료가 있을 정도로 체계적 운영이 강점이다. 감독 최수정(37)씨는 서울대 출신의 공기업 사원이었으나 야구 때문에 직장을 옮겼다. 주말에 마음껏 야구 연습을 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최씨는 “처음엔 공 잡는 법, 마운드 서는 법도 몰랐는데 하나씩 배워나갔다”며 “코가 부러지고 팔이 부러져도 야구 생각이 나는 걸 보면 운명인 것 같다”고 말했다. 최 감독의 동생 민정(32)씨도 나인빅스 2루수로 함께 참여하고 있다. 나인빅스에는 소프트볼 선수 출신, 여자야구 국가대표도 있지만 학교 선생님, 치어리더 출신 회사원 등 일반 직장인이 대다수다. 지난해 말부터는 야구 경험이 없는 사람들만 신입부원으로 뽑기 시작했다. 운동 경험이 없는 여성들에게 문턱을 낮춰주고 야구의 재미를 함께 나누고자 함이다.

 나인빅스의 목표는 한국여자야구대회 우승이다. 이를 위해 몇 달 전부터 토·일요일 남녀 가리지 않고 연습경기를 해 왔다. 지난해 나인빅스가 소화한 리그만 25회 정도다. 남자 야구팀과의 경기도 가리지 않는다. 최 감독은 “아무리 큰 점수 차로 지더라도 남자팀과 연습하다 보면 빠른 공을 받다 보니 여자팀과 경기할 때 도움이 된다”며 “노력한 만큼 꼭 우승하고 싶다”고 전했다.

업그레이드 된 ‘그들만의 리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탄생한 최초의 여자 프로야구팀 ‘록포드’를 영화화한 ‘그들만의 리그’(1992).

 국내 최초 전국야구리그인 ‘LG배 한국여자야구대회’가 다음 달 1일 시작한다. 28개 팀 5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하는 국내 최대 전국 여자야구리그인 ‘LG배 한국여자야구대회’는 사회인야구 최대 상금도 내걸었다. 1등 상금 500만원은 물론 경기당 출전비도 지원받는다. 올해부터 LG전자가 여자야구대회 후원을 결정하면서 예산이 확충됐기 때문이다. 유수호 한국여자야구연맹 홍보이사는 “여자야구가 아마추어 비인기 종목이지만 발전 가능성이 있고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는 연맹의 호소에 LG전자가 공감해줬다”며 “이번 대회부터는 LG의 후원으로 기존 여자대회 예산보다 20배 정도 많고 향후 주요 경기는 중계방송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간 기존 여자야구대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익산시장기, 계룡시장기 대회 등 1년에 약 5개 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대부분 지자체나 협회에서 개최하는 대회로 참가 야구단이 5~10팀 수준이었다. 대회 규모도 작아 5개 대회 모두 2~3주면 끝났다. 서너 경기만 치르면 결승에 오르는 게 다반사였다. 9월 1일부터 11월 25일까지 정규 경기를 비롯해 올스타전 등 총 56경기를 치러 여자야구대회가 두 달 이상 운영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기 레이스를 위해 연맹에서 ‘패자부활전’을 도입해서다. 패자부활전과 토너먼트전을 결합해 결승팀은 최대 7경기까지 참가할 수 있다. 서울 블랙펄스의 곽대이(29) 감독은 “이제까지는 지방 모텔에 숙박하면서 리그를 참가해도 한 경기만 하고 돌아오기가 일쑤였다”며 “그간 새로 장만한 유니폼·장비와 함께 우리의 기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게 됐다”고 기대감을 보였다. 경기장 규격은 남성 성인야구와 같지만 시합 규칙이 조금 차이가 있다. 경기는 7회로 정하고 시간제한을 둔다. ‘LG배 한국여자야구대회’의 경우 2시간30분이 제한 시간이다. 비가 오거나 외부 사정으로 7회까지 마치지 못할 경우 4회까지의 결과를 정식 경기로 인정한다.

 대회를 위해 대부분의 여자야구팀은 자비를 들여 사설 야구교실을 다니거나 프로 코치 출신 남자 총감독을 영입해 교육을 받아 왔다. 연맹에 등록된 32개 팀 중 스폰서가 있는 팀은 2팀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로 겪는 애로사항은 공간 부족이다. 각 팀 감독들의 가장 주요한 임무가 야구장을 섭외하는 것이다. 흙 벌판 중학교 운동장 겸 야구장도 없어서 못 구한다. 야구를 할 수 있는 펜스 등 시설이 갖춰진 곳이 극히 드문 데다 사회인야구단이 많아지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밤에 공설운동장에서 캐치볼이라도 하려고 하면 조명 값으로 수십만원을 내야 한다. 이민정(29)씨는 “야구는 한 군데서 연습하는 게 중요한데 여자 야구팀은 매주 연습장이 다를 정도로 떠돌고 있다”며 “어렵게 운동장을 빌렸는데 비가 오면 아까워서라도 비 맞고 시합한다”고 말했다.

 팀마다 팀원 구성은 고등학교 갓 졸업한 스무 살부터 아들이 고등학생인 엄마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타석에 등장하면 투수를 향해 매번 90도 인사를 공손히 하는 걸로 유명한 일본인 호소야 마리코(38)가 있는가 하면 한복 자수 디자이너인 이유영(32)씨도 8년째 플랙펄스 투수로 활동 중이다. 이씨는 “야구 선수 남자친구를 만나 야구를 이제 그만둘까 생각도 했었는데 (남자친구가) 오히려 야구를 더 무섭게 시켰다”며 “직장에서는 야구 선수가 잠깐 아르바이트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업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다 보니 팀 내에서 웬만한 물품들이 소화가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서울 비밀리에의 이송이(25) 선수는 “간호사인 팀원이 파스, 붕대 등을 준비하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팀원은 자두, 김 같은 특산물을 가져와 자급자족이 가능하다”고 전했다.

 각양각색 선수 수백 명이 모였지만 다들 소원은 비슷하다. 야구가 다시 올림픽 종목으로 돌아오고, 여자야구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것. 열악한 여자야구 인프라가 조금 더 확충되는 것. 그래서 좀 더 재미있게 야구를 하고, 나아가 세계 무대에서 ‘대한민국 여자’의 매서운 배트 맛도 보여주는 것. 비밀리에 이수미 감독은 “전국대회가 시작되면 호기심을 갖고 여자 야구를 보는 사람들이 ‘남자처럼 못하면서 그것도 야구냐’ ‘뭐하러 공놀이하느냐, 애나 봐라’라는 인신공격이 돌아올까 봐 걱정되는 게 사실”이라며 “색안경 끼고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우리가 즐기고 있다는 걸 응원해줬으면 한다”고 바랐다.

 “5년간 불임이었는데 야구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임신했어요. 야구는 저에게 ‘행운 부적’이나 마찬가지예요”라고 말하는 이 까맣게 그을린 ‘언니’를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가족에게는 비밀이라 유니폼을 빨 수 없다는 팀원을 위해 8년간 돌아가며 동료의 빨래를 해주는 사람들이다. 비록 8년 전 굴욕적인 콜드게임 패를 했지만 올해는 이번 리그 행사로 열리는 한·일전에서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당찬 언니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속 여자 야구리그를 그린 영화 ‘그들만의 리그’에서 감독 역할을 맡은 톰 행크스는 말한다. “야구는 원래 그런 거요. 힘들기 때문에 더 가치 있는 거라고.”

 언니들, 파이팅!

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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