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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쭝의 수교 2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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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

직원들은 그를 ‘바이쭝(白總)’이라 부른다. ‘백(白)사장님’이라는 뜻. 중국 산시(山西)성 린펀(臨汾)의 중장비 부품업체인 화두예주(華獨冶鑄)의 CEO인 백승찬(57) 총경리가 주인공이다. 그가 직원 500여 명 규모의 이 회사 CEO로 영입된 것은 지난 2월. ‘회사를 한국 식으로 확 바꿔 달라’는 이 회사 오너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시작했다.

 백 총경리는 스스로 ‘내 청춘 중국에 바쳤다’고 말한다. 한·중 수교 이듬해였던 1993년, 당시 대우중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에서 근무하던 그는 ‘중국에 가 제품(굴착기·지게차)을 팔라’는 회사 명령을 받고 10여 명의 청년 직원과 함께 중국 땅을 밟았다. 회사 소개서와 제품 브로슈어가 고작이었다. 시장 정보도, 흔히 말하는 관시(關係)도 없는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이런 식이다. 산시성 타이위안(太源)에서의 일이다. 허름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그는 마침 창밖에 트럭 한 대가 지나가는 것을 봤다. ‘이것이다’ 싶어 뛰어나가 택시를 잡아 타고 추적했다. 트럭이 가는 곳에 공사장이 있을 테고, 공사장이 있으면 굴착기를 팔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시장은 거칠었다. 바이어를 잡기 위해 70도 백주(白酒)를 입에 털어 넣어야 했고, 사기꾼이 빼돌린 굴착기를 찾기 위해 벽지에서 꼬박 이틀을 헤매기도 했다.

 그렇게 굴착기를 한 대, 두 대 팔기 시작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들은 서서히 판매망을 깔아 나갔고, 드디어 1996년 옌타이(煙臺)에 현지 공장을 세웠다. 지금은 다소 낮아지기는 했지만 한때 중국 굴착기 시장의 22%를 차지하는 이 분야 최강자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청춘을 불살랐던’ 10여 명의 베테랑 비즈니스맨이 이룬 실적이다.

 백 총경리에게 중국 회사 경영은 또 다른 도전이다. 그의 ‘경영 혁신’은 작은 곳에서 시작됐다. 공장에서 담배 피우지 않기, 출퇴근 시간 제대로 지키기, 내 일손이 비면 바쁜 사람 일 거들어주기…. 어쩌다 적발되면 혼을 내주고, 심하면 월급을 깎는다. 직원들 근무 기강 잡으랴, 생산·기획 회의 하랴, 외국 수출 오더 챙기랴, 그의 하루는 눈코 뜰 새 없다. 6개월여가 지난 지금 눈에 띄게 바뀌고 있단다. 건설경기 불황으로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지만 독일·일본으로의 수출이 꾸준히 이어져 버틸 만하다. 그를 보는 중국 직원들의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단다.

 중국 비즈니스 현장에서 뛴 20년, 그의 표현대로 ‘성공한 청춘’이었다. 회사를 중국 최고의 굴착기 업체로 만들었고, 초등학생 꼬마였던 두 아이가 모두 대학을 졸업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중국 회사 CEO로 일하고 있다. 그에게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는 감회를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온다.

 “20년 전, 내가 중국 회사 사장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방위 협력시대라더니, 두 나라의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긴 활발해졌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