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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800m 달리기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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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운동과 담을 쌓은 중년이라도 학창시절에는 숨이 턱에 차게 달려본 경험이 있게 마련이다. 과거 우리네 입시제도에는 체력장이란 게 있었다. 100m달리기, 윗몸일으키기, 턱걸이·매달리기, 오래달리기(여 800m, 남 1000m) 등을 합산해 고입·대입에 반영했다. 체력장은 1970년대 초 도입돼 90년대 중반 없어질 때까지 수시로 폐지론에 시달렸다. 뙤약볕에 학생들이 쓰러지는 불상사가 종종 일어난 데다 입시에 변별력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여자 800m는 기준이 퍽 너그러웠다. 한 반에 1, 2명을 빼곤 거의 만점을 받곤 했다.

 이 범상한 종목이 올림픽에서는 심상찮은 대접을 받았다. 여자 800m는 28년 암스테르담 대회에 100m, 400m계주 등 다른 여자 육상경기와 함께 처음 도입됐다 이내 금지됐다. 이유는 좋게 말해 ‘여성 보호’였다. 800m 결승선에서 기진맥진한 선수들 모습에 의견이 분분했다. 이런 격렬한 운동이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다든가, 심지어 내장기관을 교란시켜 여성의 생식기능에 안 좋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반론도 있었다. 곧바로 열린 국제육상연맹의 회의에는 10년 경험에 바탕을 둔 독일인 의사의 증언이 제출됐다. 육상선수도 여느 여성처럼 결혼하고 아기만 잘 낳더라는 얘기다. 이제 막 올림픽에 등장한 여자육상 전반의 존속 여부가 표결에 부쳐졌다. 그 결과 다른 여섯 경기는 살아남았다. 유일한 여자 장거리 경기였던 800m는 폐지됐다.

 표결에 앞서 영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이자 투창 챔피언인 히스 부인(Lady Heath)은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도 국기를 올림픽 게양대에 휘날리게 해달라. 우리는 지금 산업, 상업, 예술, 과학에서 당신들의 동지이자 동료다. 왜 육상에서는 안 되는 건가.” 여성의 참가를 고대올림픽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이렇게 받아쳤다. “펜싱이나 사격도 고대올림픽에 없었다.”

 여자 800m는 32년 뒤 60년 로마 대회에서야 재개됐다. 이후 반세기 동안 마라톤(84년), 축구(96년), 역도(2000년), 레슬링(2004년) 등의 올림픽 종목에 여자경기가 생겼다. 올 런던 대회는 권투를 더해 사상 처음 전 종목에서 여자경기가 치러졌다.

 앞서 히스 부인은 역설했다. “여자육상을 용인한다면 올림픽 참가도 용인해야 한다. 여자도 남자처럼 세계 최고의 선수와 기량을 견주는 자극이 필요하다.” 자극이 필요한 건 선수만이 아니었다. 지금 올림픽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밤잠을 설치게 하는 지구촌 축제로 성장했다. 숱한 여자선수의 활약 없이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여자 800m가 퇴출됐던 일은 이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추억처럼 들린다. 이번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의 이야기도 언젠가 그런 추억담이 되길 바란다. 그때까지 저마다의 벽을 넘어 달릴 선수들에게 미리 성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