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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82) 실망한 쑹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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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쑹자(宋家)왕조(王朝)의 창시자 쑹자수는 아들과 사위들이 중국에 군림하는 하는 것을 못 보고 1918년에 세상을 떠났다. 1930년대 초 야유회를 나온 쑹자수의 3남 즈안(왼쪽)과 막내 사위 장제스(가운데). 오른쪽이 장남 즈원(子文).  [사진 김명호]

1840년, 영국의 대포와 아편이 중국을 능욕했다. 미국·프랑스 등이 뒤를 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서구 열강이 내민 불평등 조약 문서에 군말 없이 서명했다. 조문마다 선교의 보장과 교회 건립, 선교사 보호에 관한 조항은 빠지는 법이 없었다. 1850년대 말, 프랑스와 맺은 조약에 “외국 선교사들은 중국 전역에서 토지를 빌리거나 구입할 수 있고, 무슨 건물이건 지을 수 있다”는 조문이 있을 정도였다.

교회는 중국의 법률이 미치지 못했다. 치외법권 지역이나 매한가지였다. 선교사들은 외교사절이 부럽지 않았다. 면책특권 등 온갖 혜택을 누렸다. 십자가만 내걸면 아무리 흉악한 사건을 일으켜도 시비를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청나라 정부는 이들을 수수방관했다. 국력이 약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중국에 와 있던 외국인 선교사 중에는 형편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토지 몰수는 기본이었다. 부녀자 겁탈 정도는 사건 축에 들지도 못했다. 직접 찾아와서 누구네 집 딸이 예쁘다고 알려주는 중국인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없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중국은 철저히 패배했다. 대청제국은 점점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이 넓은 땅덩어리, 들고 갈 것도 아니고 빈 땅에 교회를 짓건 말건 내버려둬라.” 교회는 외국인들의 활동거점으로 둔갑했다.

전국 방방곡곡에 4000여 개의 교회건물이 올라갔다. 산둥(山東)지역에만 1300여 개가 있었다. 먼 옛날 황건적의 발상지라며 두려워하는 선교사들도 있었다. 한 영국인 선교사가 런던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중국은 우리가 생각지도 않았던 곳까지 외국의 선교사와 상인, 학자들에게 개방시켰다. 이 나라는 완전히 우리 수중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중국인들의 농토를 점령하고, 평생 눌러앉을 생각을 한다면 엄청난 죄를 저질러야 한다. 언제 무슨 난리가 일어날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무섭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하늘은 우리를 돌보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때는 무력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외국 선교사들의 횡포가 극에 달했지만 정부는 무능했다. 현실은 사람을 변화시켰다. 냉가슴을 앓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쑹자수(宋嘉樹·송가수)는 혁명파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멸망시키지 않는 한 중국은 희망이 없었다.

중국의 하늘(天)은 서양의 하늘과 뜻이 달랐던지 창장(長江) 유역에서 서양종교 배척운동이 벌어졌다. “서양귀신 내쫓자”는 전단들이 도시의 대로와 골목을 수놓았다. 시도 때도 없이 교회 창문에 돌덩이가 날아들었다. 선교사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에 뿌려진 인분 냄새에 코를 싸맸다. 밖에 나왔다가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머리통을 싸매고 돌아오는 선교사들이 속출했다. 화염에 휩싸이는 교회가 한둘 생겨났다. 외국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중국인 신자들은 “서양귀신 믿었다가 큰일 나겠다”며 교회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쑹자수는 1개월간 현지 조사에 나섰다. “원인은 간단했다. 단테의 말이 맞았다. 권력은 사람을 부패시킨다”고 일기에 적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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