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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멈춘 ‘어른아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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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호 34면

몇 년 전 서울고등법원에서 민사재판을 맡고 있었을 때였다. 강남 한복판에 있는 대형 식당을 둘러싼 민사사건이 있었다. 원고는 40대 초반의 세련된 모습의 남자였는데 화해기일에 어머니와 함께 출석했다. 원고에게 유리한 조건이 제시됐고 변호사도 권하는데 원고는 도대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계속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더니 어머니를 향해 “어떻게 할까요?” 묻는 것 아닌가. 어머니가 머리를 끄덕이자 그때서야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서 큰 식당의 주인다운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혼소송에서도 이런 모습을 자주 봤다. 중·상류층의 이혼사건 상당수는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란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혼인생활을 보면 몸만 어른일 뿐 정신은 여전히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과정부터 어머니가 주도한다. 결혼생활의 사소한 갈등도 직접 해결하지 못해 시시콜콜 ‘엄마’와 의논한다. 외국에서 유학 중이던 신혼부부가 국제전화로 서로 ‘엄마’의 훈수를 받으며 싸움을 한 사건도 봤다. 재판 과정에서도 부부는 뚜렷한 자기 의견이 없고 엄마들 목소리만 높아 누가 당사자인지 모를 지경이다.

이들은 외면적으로는 괜찮은 학력과 지위를 가진 멀쩡한 성인인데도 내면은 완전히 어린이 같은, 이른바 ‘어른아이(adult-child)’이다. 주체성이 약해 결정을 해야 할 때면 언제나 부모에게 의존하고 책임감이 없다는 점이 공통된 특징이다. 독립된 삶을 살아갈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 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비슷한 유형을 보이는 듯하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과외를 받고, 10대가 돼서도 학교 성적에 대한 압박이 강해져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대학 선택도 어머니 몫이다. 대학 진학 후에도 부모가 수업 내용을 확인하고 시험 성적에 대해 항의하는 일이 이제 흔한 일이 됐다. 심지어 취업한 자녀의 직장상사에게까지 찾아와 부탁하는 부모도 있다.

왜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일까? 사람은 각 단계마다 해결해야 할 고유한 과업이 있고 이를 올바로 겪어내야 성장할 수 있다. 청소년기는 놀고, 실험해 보고, 실패하면서 자신을 이해하고 정체성을 세우는 시기다. 이때 숨 쉴 공간과 자유가 필요한데 과잉보호하는 부모 아래에서는 정체성 문제로 씨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정체성은 삶을 지탱해 주는 척추와 같은 요소다. 정체성이 약하면 주체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고 생명력이 시들어 삶의 어느 단계에서든 무너지기 쉽다. 급증하는 자살·우울증·약물중독 등은 외적인 사건 이전에 내적인 정체성 붕괴가 근본 원인이다. 과잉보호로 양육된 사람은 언젠가는 터질 시한폭탄과 같다.

독수리는 새끼가 자라면 강제로 둥지에서 밀어내 날아오르는 훈련을 시킨다. 과잉보호하는 부모는 자식이 충분히 날 수 있는데도 계속 둥지에 두고 먹이를 갖다 먹여 주는 어미새와 같다고 할까. 이런 새끼는 다 커도 날지 못하는 바보새가 될 수밖에 없다. 아이 교육을 잘하겠다는 열망이 오히려 아이의 정체성을 붕괴시키는 비극을 낳는 것이다.

사교육이 극성인 강남 지역에 전국 소아정신과 의원의 18%가 몰려 있고 환자가 넘쳐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이를 꽁꽁 묶어 끌고 가면서 스스로 양육을 잘하고 있다고 믿는 부모들. 아이는 숨이 막혀 비명을 지르는데도 그들은 듣지 못한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기도 전에 부모가 앞서 끌고 가면 아이는 자기 생명력과 힘을 확인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 아이를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강건한 사람으로 키우려면 부모는 그 뒤에 한 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아이가 혼자 모험하고 상처 입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되 위험하거나 지쳤을 때 뒤에서 살며시 잡아 주는 게 부모의 일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임제록)’. 어느 곳에 있든지 주체성을 가지면, 그 있는 곳 모두가 참되다는 뜻이다. 주체성을 갖지 못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가짜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의 중심에 강건한 뼈대가 바로 서야 주체성을 갖는다. 자녀가 정말 가치 있는 삶을 살기 바란다면 자녀가 홀로 설 수 있도록 서슴없이 놓아 줘야 한다. 자유와 독립의 맛을 모르는 어른아이가 어떻게 100세 시대를 살아 나가겠는가.



윤재윤 춘천지방법원장을 마지막으로 30여 년간의 법관생활을 마쳤다. 철우언론법상을 받았으며, 수필집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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