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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무작정 쓴다, 아니면 괴롭기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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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이듬은 “늘 버려진 것, 배제되고 추방된 것에 관심이 많았다”며 “시를 통해 이들이나 나의 삶도 괜찮았다는 걸, 이 세상의 한구석에서 잠시나마 안간힘으로 아름답게 존재했다는 걸, 그럴 가치가 있었다는 걸 말하고 싶다”고 했다. [사진 문학동네]

가시를 세운 듯했지만 여린 속내는 편지 사이 사이에서 배어 나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해외 파견작가 프로그램으로 이달 말까지 독일 베를린에 머무는 시인 김이듬(43). 그는 “시에 대해 말하는 일이 굉장히 곤혹스럽다. 인터뷰에 답하지 않고 개길까, 짤막하게 몇 마디 써 보낼까 생각했었다”며 e-메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를 읽기가 쉽지 않았는지 , 고생했다”며 덧붙인 말에는 여린 마음결이 느껴졌다.

 작품으로는 ‘금지된 것에 대해 용감하게 입을 여는 여전사’란 평을 들을 정도지만, 인간 김이듬의 ‘숨겨진 소심함’이 제대로 그려진 시가 ‘사과 없어요’다. 자장면을 시켰는데 삼선자장면이 나오자, 그는 망설인다. 바꿔달라고 하면 종업원이 짤릴까, 괜히 말했다 일만 복잡해지는 게 아닐까 속으로 이리저리 재다 그냥 삼선자장면을 먹는다.

 “대범한 듯 보이지만 엄청 소심하고 연약하며 뒤끝이 장난 아니에요. 근데 난 싸우면 언제나 졌어요.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어요. 사과해도 다시 맞는 사회, 용서가 없는 사회에서 싸움을 피하는 경우도 많죠.”

 김씨는 김언·황병승 등과 함께 난해시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문어와 구어를 섞어 구사하며 경계를 허무는 그의 시는 거칠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렇지만 ‘만년청춘’을 포함해 이번 본심에 오른 근작은 기존 작품에 비해 표현이 세련돼지고 가다듬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예심을 맡았던 조재룡 고려대 교수는 “‘만년청춘’은 김이듬의 새로운 출사표다. 발랄했던 예전의 시에서 벗어나 자기성찰이 강한 새로운 세계를 향해 안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읽힌다”고 평했다.

 김씨는 가족이야기를 우화(寓話)로 끌어들여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데 탁월하다.

 “시를 쓰기 전까지 가장 불행한 유년을 보냈다고 생각했어요. 내 문제가 가장 심각했죠. 시를 쓰면서 타인의 아픈 자리도 보이더군요. 그 극비사항을 글로 누설하면서 천천히 스스로 치료되는 듯했죠.”

 그는 ‘무작정’ 쓴다고 했다. 시를 쓰지 않으면 괴롭기에, 시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시를 쓴다. “시는 안주하려는 나를 두들겨 패고 갱신케 해요. ‘이 삶이 맞느냐고,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잘하는 짓이냐’고 추궁하죠. 시를 읽고 시를 쓰는 과정은 조금씩 사람이 돼가는 과정이에요.”

<만년청춘>

김이듬

매년 이맘때면 터지는 폭죽소리 환호하는 사람들 발산하고 발작하고 발화하고 발포하고 발을 굴려요 실신할 때까지 그러고 싶으면

귀를 막아도 들리고 눈을 감아도 훤하다면 갈등도 없이 가고 있다면 축제는 돌아오고 장사는 끝날 줄 모르고 확성기는 꺼질 줄 모르고 아무리 소리 질러도

네가 그들과 같이 간다 해도

나는 떠나야 해요 세상 끝으로 끌려가기 꺼려지는 곳으로 거기도 축제라면 거기를 떠나야겠지만 어디로 갈까요 방방곡곡 축제장이니

부자고 젊고 똑똑하고 심지어 진보적이기까지 한 당신이 시를 쓴다면 콘서트를 연다면 소녀가 쓰러지고 성황이고 계단은 가파르고 초청가수는 보통 가수가 아니니까 노래를 멈추지 않겠지

노래 부르는 사람은 노래하고 음반을 사는 사람은 음반을 사고 그들은 불법음반을 사지 않을 거야 그림도 살 수 있겠지 살 수 있는 사람들만 살 수 있겠지 지금과 같다면

한번 시인은 영원히 시를 쓰고 일단 화가는 계속 화가고 화가 난 어중이떠중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게다가 넌 계단을 치우지는 않잖아 청소하는 사람은 청소를 하고 올라가는 사람은 계속 올라가고 옥상에는 비밀 화원이 있고 떨어지던 사과가 아직도 떨어지고 있다면 우리가 수줍게 키스를 나누고도 영원히 키스를 해야 한다면 웃는 사람들만 계속 웃는다면

만년청춘이라면

이토록 생이 아름답기만 하다면 순간순간이 축복이라며 눈을 돌리고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저 시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 해도
이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른다 해도
영원히 지속된다면

떠나야 해요 나는 거기가 어디든

◆김이듬=1969년 경남 진주 출생. 2001년 계간 『포에지』로 등단. 시집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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