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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몰래 16억 충전된 교통카드 썼다가…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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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 서울 강남에 사는 주부 박모(47)씨는 지난 3월 자신의 티머니(T-money) 교통카드에 약 16억원이 충전된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티머니는 버스·택시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이용은 물론 편의점이나 대형마트에서도 현금처럼 쓸 수 있는 스마트 카드인 만큼 ‘로또 1등’ 수준의 거액이 계좌로 들어온 셈이다. 박씨는 이 카드로 최근까지 집 근처 편의점에서 과자·음료 등을 구입하는 데 150만원 정도를 썼다.

 #2. 평범한 가장 남모(51)씨는 어느 날 갑자기 마법 같은 일을 경험했다. 2009년 초 서울 중구의 한 가판대에서 구입한 티머니 카드가 돈을 추가로 충전하지 않고 아무리 써도 잔액이 바닥나지 않는 것이다. 남씨는 이 카드를 편의점에서 마음껏 현금처럼 사용했다. 스낵 자판기를 이용할 때도 티머니를 썼다. 이렇게 남씨가 써온 돈은 1000만원이 넘는다. ‘JTBC 뉴스10’이 지난달 27일부터 사흘간 보도한 티머니 카드의 ‘거액 입금’ 사례들이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의 티머니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길하다며 쓰레기통에 버릴 것인가, 공돈을 쓸 수 없다며 경찰에 신고할 것인가. 아니면 위의 두 경우처럼 필요할 때마다 요긴하게 쓸 것인가.

 이런 예기치 않은 선택지를 받아든 사람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다섯 명. 하지만 몇 명이 더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다섯 명은 모두 ‘마법의 카드’를 긴요하게 썼다. 계좌에 들어온 1600만원으로 마트를 다니며 쇼핑을 한 주부, 주로 서점을 다니며 500만원어치 책을 산 학생에 교통비로만 알뜰하게 150만원 이상 쓴 경우도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비밀은 카드에 장착된 칩에 있다는 게 업체 측의 설명이다. 한국스마트카드는 이번에 오류를 일으킨 카드가 ‘마이페어(Mifare) 칩’ 카드라고 밝혔다. 마이페어칩은 네덜란드·독일 등 유럽 업체들이 보급한 스마트카드 칩으로 한때 국내 교통카드의 대부분이 이 칩을 사용했다.

 2004년 7월 서울시가 버스·지하철 환승할인제 등 대중교통 체계를 개편하면서 도입한 티머니 카드도 그중 하나였다. 서울시 교통정책과 관계자는 “당시 급증하는 교통카드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 보안에 취약점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마이페어 칩을 기반으로 한 티머니 카드를 발급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카드 발행과 관리를 맡고 있는 한국스마트카드의 해명은 좀 다르다. 박영우 한국스마트카드 최고기술경영자(CTO)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안전하다는 칩을 구매했음에도 예상하지 못한 에러가 수백만분의 1의 확률로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페어 칩의 근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예상 밖의 에러 때문이란 얘기다. 그는 “2004년 말 일부 카드가 사용해도 잔액이 줄어들지 않는 등 오류를 일으켜 회수 조치를 했는데 아직까지 회수가 안 된 일부 카드에서 최근 에러가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2005년부터는 IC(Integrated Circuit·집적회로) 칩이 내장된 스마트카드만 발급해 오고 있기 때문에 보안상 큰 문제는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오류를 일으킨 마이페어 칩 카드가 아직도 상당량 시중에 풀려 있다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2004년 ‘보급형 티머니’라는 이름으로 발급된 마이페어 칩 카드 230만 장 중 아직 회수하지 못한 카드가 8만 장에 달한다. 현재 얼마나 많은 시민이 ‘공짜 티머니’의 유혹에 노출돼 있는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티머니 측은 “마이페어칩 카드 중에서도 특정 회사의 제품만 오류가 생긴 걸로 파악됐다”며 "실제로 오류 가능성이 있는 카드는 1000장이 안 된다”고 밝혔다.

 자신이 갖고 있는 티머니 카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발견하는 계기도 대개는 우연이다. 앞서 거론한 남씨의 경우 2009년 서울의 한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티머니로 지불했다. 그런데 줄어들어야 할 잔액이 오히려 4000원가량 늘어났다. 물건을 샀는데 도리어 돈이 충전된 셈이다. 이후 이 카드는 정상적으로 결제가 됐다가 혼자 재충전이 되는 등 써도 써도 재물이 줄지 않는 ‘화수분’ 카드로 변신했다. 당연히 업체 측은 이런 카드들을 회수하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하지만 묘안이 없어 서울시도, 한국스마트카드도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티머니 카드에 거액이 들어온 사람들은 정말로 횡재를 한 것일까. 답은 정반대. 불행히도 앞서 거론한 사람들은 돈벼락이 아니라 날벼락을 맞은 처지가 됐다. 티머니 업체가 이 사건을 경찰에 고발하면서 수사를 받게 됐기 때문이다. 서울 종암경찰서는 이미 남씨 등을 횡령 혐의로 조사했다.

 횡령이란 타인의 재물을 함부로 쓰거나 돌려주지 않는 행위를 말한다. 형법상 횡령죄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버스나 지하철에 두고 내린 물건을 획득한 것처럼 상대방이 맡긴 재물이 아닐 경우에는 ‘점유이탈물 횡령죄’가 적용된다. 이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태료 처벌을 받는다.

 잘못 충전된 티머니를 쓴 사람들에겐 어떤 혐의가 적용될까. 송영욱 변호사는 “자신의 예금계좌에 잘못 송금이 됐을 때 이를 함부로 쓰면 횡령죄가 적용된다”며 “잘못 충전된 티머니도 함부로 쓰지 않고 보관할 의무가 있는 만큼 횡령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대법원은 2008년 한 주식회사 직원이 잘못 송금한 4억원을 인출해서 쓴 경우 횡령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사례도 있다. 송 변호사는 “최근 점유이탈물 횡령죄에 해당하는 사안에도 횡령죄를 적용하는 등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티머니 카드가 잔액이 줄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도 모르게 거액이 충전됐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썼다가는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티머니 오류로 발생한 사안에 대해 사용자를 형사 처벌까지 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신효진(59)씨는 “우리 나이 때는 카드 시스템을 잘 모르니까 잘못 충전된 줄 모르고 쓸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서울시나 티머니 업체가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 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서도 기계적 오류로 발생한 사안인 만큼 선처하는 게 타당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양지열 변호사는 “사안이 중하지 않은 정도라면 티머니를 부당하게 사용한 사람에 대해 검찰이 기소유예하거나 법원이 선고유예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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