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100억년의 타임머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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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같이 세태가 답답할 때는 타임 머신이 있어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치는 장면이나 광개토대왕이 만주 벌판을 누비는 장면을 볼 수 있다면 침체된 우리 국민의 사기가 크게 진작될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현대 과학은 공상과학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그런 일을 우주적인 규모에서 해내고 있다.

얼마 전 네이처지의 발표에 따르면 인도.프랑스.독일 공동 연구팀이 우주의 나이가 지금의 6분의 1 정도밖에 안 되었을 때 우주의 온도가 지금보다 서너 배 높았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이다. 우주의 나이가 약 1백20억년이라고 한다면 1백억년 전의 상황을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밝힌 대로 빛의 속도는 불변의 절대적인 양이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는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는 초속 30만㎞다.

이 속도로 지구에서 달까지 가는 데는 1초 정도 걸린다. 태양까지는 약 8분 거리다. 그러니까 이 순간에 태양이 사라진다면 우리 눈에는 8분 후에야 하늘이 깜깜해질 것이다.

태양계의 끝까지는 광속으로 5시간 정도의 거리이고,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다른 별은 약 4년 거리에 있다.

이처럼 빛은 일정한 속도로 멀리 있는 천체로부터 지구를 찾아오기 때문에 어느 천체를 보는 것은 그 천체의 과거를 보는 것이다.

물론 멀리 볼수록 더 오래 전의 과거를 보게 된다. 사람이 맨눈으로 겨우 볼 수 있는 안드로메다 성운을 볼 때는 약 2백만년 전 과거를 본다.

요즘은 허블 우주망원경을 대기권 밖의 지구 궤도에 올려놓고 대기의 방해를 벗어나 수십억년 전 과거 젊은 우주의 깨끗한 상을 얻고 있다.

인터넷에서 청소년기의 우주를 한번 보기를 권한다. (http://oposite.stsci.edu/pubinfo/pictures.html)

이번에 지상의 8.2m 짜리 자외선 망원경을 사용해 초기 우주의 온도를 처음으로 측정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냐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발견은 우리가 속한 우주가 과거 어느 시점에 거대한 폭발로 시작돼 계속 팽창하면서 식어가고 있다는 빅뱅 우주론을 확인해 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65년에 미국 벨연구소의 펜지아스와 윌슨이 태초의 대폭발 에너지가 절대온도 3도에 해당하는 미미한 메아리로 현재의 우주에 충만한 사실을 발견해 빅뱅 우주론이 확립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197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모든 운동이 정지하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절대 0도는 섭씨로 영하 2백73도다. 그러니까 우주 공간의 현재 온도는 섭씨 영하 2백70도 정도라는 말이다.

이번 발표에서 관측한 빛은 약 1백억 년 전 초기 우주의 퀘이사라고 알려진 특이한 천체에서 나온 빛이다.

1백억 년 전 과거를 본 것이다. 이 빛에는 당시 우주 공간에 존재한 탄소 원자와 수소 분자의 스펙트럼이 들어 있었고, 그 스펙트럼으로부터 당시의 온도가 절대온도로 10도 정도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한편 우주가 대폭발로 시작돼 계속 팽창하고 식어간다면 팽창 속도로부터 어느 시점에서의 온도를 계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스펙트럼으로부터 얻어진 10도라는 값은 우주의 식는 속도로부터 계산된 값과 잘 맞았다.

수시로 원칙이 바뀌고 믿을 게 없는 것이 인간 사회인데 비해 자연은 1백억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예측 가능한 법칙에 따라 운영된다.

기껏 거대한 천체망원경을 만들어 1백억년 전 과거를 보았는데, 당시에는 원자 구조가 지금과는 달라서 해석할 수 없는 스펙트럼을 나타낸다면 참 당황되고 허망한 노릇일 것이다.

또 우주의 팽창 속도에서 당시 우주의 온도를 예측할 수 있는 법칙이 가변적이라면 관측한 온도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이번 결과를 보면서 우주 역사를 통해 불변하는 빛의 속도와 신실한 자연의 법칙을 되새겨 본다.

그리고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직립해서 우주를 바라보고 우주의 기원을 논할 수 있다는 데 대해 놀라움과 아울러 감사의 마음을 가져본다.

김희준 (서울대 교수.분석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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