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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스탠더 뒤에 숨은 안철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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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김종윤
뉴미디어 에디터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 지난 19일 『안철수의 생각』을 출간하고, 곧이어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떠오른 생각이 있다. ‘정의’의 문제다.

 안 원장은 2009년 MBC의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재미를 봤다. 단 한 번의 오락 프로그램 출연으로 ‘기업인 안철수’는 ‘국가 지도자 안철수’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강호동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자신의 인생철학을 친근하게, 그러면서 확고하게 시청자에게 전달했다. 국민에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이미지는 이때부터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맛에 길들여졌나 보다. 그는 이번에도 예능 프로그램으로 또 한 방을 노리는 것 같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은 거절하고, 대권 도전에 대해서는 연막만 치던 그가 자신만의 독특한 감수성으로 대권 방정식을 풀어가는 셈이다.

 이쯤에서 이런 방식에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힐링캠프는 안 원장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캠프가 될 공산이 크다. 사회자인 개그맨 김제동은 안 원장을 위한 분위기 메이커가 될 터이고. 이렇게 짜인 플롯에서는 시청자(또는 유권자)들이 ‘듣고 싶은 말’은 나올 틈이 없을 것이다.

 이런 장면, 안 원장이 툭하면 강조하는 ‘정의’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그가 올라가야 할 링은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미 대권주자 여럿이 글러브를 끼고 링 위에서 격투를 벌이고 있다. 안 원장은 피 튀길까 봐 뒷전에 물러서 자신에게 유리한 대진표 짜기에만 골몰하는 모습이다.

 이게 왜 정의롭지 못하냐 하면 공정성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시의 퍼블릭 시어터(Public Theater)는 매년 여름 센트럴파크에서 무료로 셰익스피어 작품을 공연한다. 이 연극을 보고 싶으면 누구든지 선착순으로 나눠주는 입장권을 받기 위해 줄을 서야 한다. 문제는 일부 돈 많은 뉴요커들이 줄을 대신 서주는 라인스탠더(line stander)를 고용해 잡음이 생긴다는 점이다. 라인스탠더는 표를 받아주는 대가로 수백 달러를 받는다. 모든 시민에게 셰익스피어 연극을 볼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한다는 행사의 정신이 훼손된다는 논란이 커지는 이유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원하는 재화를 자유롭게 거래하고,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 이익을 보기 때문에 라인스탠더 고용이 공정성을 훼손하는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착순 원칙이 깨지면 줄서기의 도덕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안 원장은 라인스탠더를 고용한 부자와 비슷하다. 자신은 줄 서지 않고 적당한 비용으로 뒤에서 혜택만 보려는 듯한 그림자가 그를 감싸고 있다. 이는 누구보다 도덕을 강조하고, 원칙을 중시한다는 그의 이미지와도 거리가 멀다. 이미 유권자들은 안철수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뒤에 숨어 눈치를 보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