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밭 고성방가 안 돼요, 백제문화유산이거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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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서울 석촌동 고분군’은 사적 243호로 등록된 돌무덤이다. 문화유산인 이 곳은 주택가에 위치해 동네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기도 한다. 송파구가 2009년 2m 정도 되는 높이의 담장벽을 허물고 공원화 하면서 이곳을 찾는 내방객도 늘었다. 하지만 이후 문화유산을 훼손하거나 이용규칙을 어기는 사례도 늘었다. 이현희(55·송파구 석촌동)씨 등 주부 5명이 ‘지킴이’로 나선 이유다.

글=전민희 기자
사진=장진영 기자

“서울 석촌동 고분군은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지킴이 활동을 하는 장순삼·이현희·서경숙·김성숙·강선희(왼쪽부터)씨와 조윤민(왼쪽 네번째)양.

12일 오후 6시 서울 석촌동 고분군. 높이와 둘레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거대한 돌무덤들 사이로 자전거 한 대가 산책로를 ‘쌩’하고 가로질러 간다. 연두색 조끼를 걸치고, 오른손에 빨간봉을 쥔 이현희씨가 이 광경을 보고는 자전거 주인에게 소리를 쳤다. “이곳은 문화유산입니다. 자전거를 타면 안 됩니다. 내려서 끌고 가세요.” 이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멈춰서 자전거에서 내렸다.

잠시 후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과일을 먹고 있는 가족이 눈에 띄었다. 이번엔 서경숙(43)씨가 나섰다. “잔디밭 안으로 들어가면 안됩니다. 문화유산을 이용하는 기본규칙입니다. 나오세요.” 쩌렁쩌렁한 서씨의 말에 가족들은 황급히 돗자리를 챙겨 잔디밭에서 나왔다.

내방객들의 잘못된 행동을 감시하고 제지하는 이들이 바로 ‘서울 석촌동 고분군 지킴이(이하 지킴이)’다. 이씨와 서씨를 비롯해 김성숙(43)·강선희(41)·장순삼(47)씨 등 5명의 주부가 ‘우리 동네 문화유산은 우리가 지킨다’는 일념으로 짧게는 3년, 길게는 9년째 지킴이 활동을 하고 있다. 석촌동에 거주하는 이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틈만 나면 이곳을 찾는다.

“관리사무소가 문을 닫는 6시 이후에는 사람들이 잔디밭으로 들어가 음주가무를 즐기고, 고성방가를 일삼아요. 문화유산에서는 그런 행위가 금지돼 있는데 말이죠.” 이들은 관리사무소가 문을 닫는 시간부터 오후 10시까지 석촌동 고분군 구석구석을 돌며 내방객들의 잘못된 행위를 감시한다. 서씨는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밤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많다”며 “문화유산인 이곳을 일반적인 공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킴이 활동의 중심에는 이현희씨가 있다. 이씨가 이곳에서 자원봉사를 한 지 올해로 9년째다. 활동을 시작할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아들이 내년이면 벌써 고3 수험생이 된다. “처음에는 문화유산이 집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들에게 우리 동네에 백제시대 선조들의 자취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산책을 나왔었어요. 하지만 내방객들은 이곳을 문화유산이라 생각지 않더군요.” 곳곳에는 빈 음료수병, 과자봉지와 같은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무덤 위에 올라가 얘기를 나누는 학생들은 물론, 술에 취한 내방객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당시 아들은 그에게 “사람들이 왜 문화유산을 소중히 할 줄 모르냐”고 물었다. 이씨는 아들의 질문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문화유산을 지키고 본보기를 보여야 할 어른으로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아들의 말을 들으니 ‘우리 문화유산을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석촌동에서 20년 이상 거주한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됐죠.” 이후 틈만 나면 아들과 함께 석촌동 고분군을 찾았다. 낮에는 쓰레기를 줍고, 겨울에는 눈을 치웠다. 명절에도 차례를 지낸 뒤엔 이곳을 찾아 술판을 벌이는 내방객들을 제지했다. 그로부터 9년, 이제는 석촌동 고분군이 ‘제2의 집’ 같이 느껴진단다. “하루라도 석촌동 고분군을 찾지 않으면 뭔가 허전해요. 아프지 않는 한 하루 한 번은 반드시 찾습니다.”

5~6년 혼자 활동하다 보니 힘에 부칠 때가 있었다. 그는 아들이 초등학교 재학 당시부터 학교 근처를 돌며 학교폭력 예방과 교통지도 활동을 해 오던 엄마들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엄마들은 그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때부터 하나, 둘 모인 회원수가 현재 5명까지 늘었다. 엄마들은 물론 자녀들까지 참여하면서 15명의 초·중·고교생들도 틈나는 대로 이곳에서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지킴이 활동은 자원봉사에 대한 이해가 없고 봉사활동을 거창하게만 생각했던 아이들을 변화시켰다. 조윤민(송파구 석촌초6)양은 “석촌동 고분군에서 쓰레기를 줍는 일이 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지킴이 활동은 부모와 자녀들이 대화하는 창구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강선희씨는 1년 전 아들에게 사춘기가 찾아온 이후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공부하라”는 강씨의 말에 아들은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선을 그었다. 부모와의 대화를 거부한 그의 손에선 스마트폰이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6개월 전부터 아들과 함께 지킴이 활동을 하면서부터 둘 사이 관계가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 공통 화제가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늘었다. 아이는 학교생활에 대한 고민도 엄마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강씨도 아들의 상황이나 입장, 고민을 이해하게 됐다. “요즘에는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기 전에 ‘이 얘기에 상처받지 않을까’ 한 번 더 고민하게 됩니다. 그렇게 배려하자 사이가 좋아졌어요.”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나 떼지어 몰려다니는 고등학생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서러운 건 자신들을 공원 미화원으로 알거나 돈 받고 일하는 사람으로 오해해 무시할 때였다. 김성숙씨는 “딸아이와 함께 지킴이 활동을 하다 할머니들에게 잔디밭 출입을 제지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잔디밭에 들어가든 말든 상관 말고 강아지 배설물이나 제대로 치우라’는 말을 들었어요. ‘왜 이런 소리까지 들으면서 이 일을 하나’하는 회한이 들기도 했죠.” 김씨뿐 아니다. 이곳에서 지킴이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지킴이 활동 한다고 누가 알아주나’ ‘남는 게 뭔가’ 등의 후회가 밀려올 때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그래도 다시 조끼를 입고 봉을 든다. 이제는 석촌동 고분군을 지키는 게 그들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어때요. 저희들로 인해 석촌동 고분군이 후대에 물려줄 수 있게 좀 더 나은 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함께 문화유산을 지키고 싶은 분들 이곳으로 오세요. 언제든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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