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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정학적으로 중도로 갈 수밖에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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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호 03면

지난 9일 오후,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박경리(朴景利) 문학공원에서 만난 김지하 시인(위·아래 사진). 그는 장모인 박경리 선생이 타계한 직후 부인 김영주씨와 함께 원주로 이주했다. 13세 때 군부대에 근무하던 부친을 따라 목포에서 이곳으로 옮겨 원주중학교를 졸업한 그로선 제2의 고향으로 귀향한 셈이다. [JTBC 김영묵 기자]

“북한, 거의 마지막이다.” “이번엔 박근혜 가능성 가장 높다.” “한반도 기운이 강원도로 몰린다.”
점술가의 점괘가 아니다. ‘오적(五賊)’이라는 반독재 저항시로 유명한 김지하(金芝河·본명 金英一·71) 시인의 예언들이다. 9일 오후 만난 김 시인은 말투가 약간 어눌했지만 형형한 눈빛으로 예의 육두문자를 섞어 쏟아내는 이야기가 거침없었다. 예술을 논하는가 하면 현실정치로 넘어가고, 한반도를 거쳐 지구를 한 바퀴 돈다. 동학·기독교·공자·원효·칸트를 넘나들며 우주·자연·생명으로 종횡무진 내달린다. 인터뷰어의 얄팍한 그릇으로 따라잡자니 숨이 턱에 찰 지경이다. 얼마 전 새 시집 시김새를 출간한 그는 여전히 작품 활동도 왕성하다.

[허남진 대기자의 피플&토크] 시인 김지하가 보는 요즘 세상

-시김새의 작품들은 ‘오적’의 피 끓던 절규와 사뭇 다른 기조인데, 김지하 시세계 40년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정신병이 크죠. 정신병의 근원은 감옥이고, 그 뒤론 생명운동 쪽으로 전환했지. 생명의 근원적인 세계로 우리가 다같이 복귀함으로써 투쟁이 필요하지 않는 그런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자, 빈부가 고르게 균형 잡는 그런 이야기들을 시작했지요. 그때부터 내가 변한 거요. 나는 가톨릭인데 내 집안은 본래 동학이에요. 동학을 감옥 안에서 다시 시작했는데, 화엄경과 동학의 시초가 ‘모심(侍)’이에요. 거기에 내가 끌어들인 게 예수야. 예수는 2000년 동안 전 세계 인류 가운데서 모심이 가장 철저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상을 융합한 내 철학의 요체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심이에요.”

생명사상·원시반본(原始返本)·율려(律呂)·흰그늘 등 난해한 개념들을 선보여 온 그는 화엄과 동학의 세계를 넘나들며 근래엔 후천개벽과 모심, 그리고 ‘시김새’ 등을 입에 담고 있다. 시김새는 한국 전통음악의 꾸밈음·장식음을 뜻하는 식음(飾音)에서 나온 말로 ‘곰삭은 맛’이란 뜻과 통한다고 한다. 삶의 체험을 삭히고 발효시켜 나오는 소리, 새로운 개념의 시세계다. 일기 쓰듯 매일 새벽 썼다는 작품들에선 격렬함 대신 칠순의 곰삭은 시쿰함과 구수함이 묻어 나온다. 김씨는 모심이란 모든 존재를 존경과 자비로 대하는 마음이며 이것이 세계를 구한다고 본다. 생태 위기를 이겨 내고, 호혜의 경제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 모심의 예술적 표현이 바로 시김새다.

-시 ‘오적’에서 다섯 도둑으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꼽았죠. 오적들이 지금은 개과천선(改過遷善)했다고 보십니까.
“개과천선은 무슨…. 지금 이명박 대통령 쪽 돈 먹은 애들 쭉 시리즈로 나오는 거 보세요. 얼마 전 내가 ‘오백적’이란 얘길 했어요. 더러운 놈 많아. 진보운동한다는 통합진보당까지 부정 당하잖아.”

-최근 통진당 사태를 어떻게 보세요.
“내가 보기엔 거의 마지막에 온 거 같아요. 걔네들 사상이나 경향을 보면 그래.”

그는 종북주사파와 북한을 동일시하는 듯했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묻자 곧바로 북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북한 말이요. 군벌관계 등 내부 문제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힘은 외부에서 와요. 외부의 변화에 의해 올겨울 아니면 내년, 가까운 시일 안에 쿠데타가 일어나든지, 틀림없이 뭔가 와요. 안 올 수가 없어. 북한 경제가 최근 플러스로 올라갔는데 그게 오히려 더 위험한 거야.”

-1990년대 ‘죽음의 굿판을 집어 치워라’라는 칼럼을 쓴 뒤 진보진영으로부터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어왔죠.
“나도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이지만 내가 그쪽 사람들한테 화가 나는 이유는 북한놈들의 작전에 말려들어 끌려다니고 있다는 점이야. (그러곤 감옥 시절 북한과 그들의 사주를 받은 좌파 동지들로부터 당했다는 일화들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들 때문에 내가 정신병에 걸렸고. 하여튼 난 지금은 중도(中道)요. 한국은 지정학적 조건을 볼 때 중도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중도가 과연 길이냐 하는 사람들이 있어. 야당에서도 기회주의적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왜 하느냐는 거지. 그런데 그들은 중도가 뭔지 몰라요. 진정한 중도는 역동성을 갖고 있어. 공자 얘기야. 시중(時中) 알잖아. 즉 좌보다 더 좌, 우보다 더 우일 수 있는 거. 그래서 중도가 무서운 거요. 그러면서도 필요할 땐 ‘나 가운데야’ 하고 버티고 서 있는 거.”

그는 “태극기 밟고 섰던 OOO 있잖아. 그 사람도 간첩이야”라며 중진 정치인의 이름을 들먹였다. “그런 X들이 국회의원 되겠다고 나서면서 이번에 (종북주사파 실체가) 다 드러난 거야. 상황 판단을 잘못한 거지. 상황 판단을 잘못하면 마르크시즘은 끝이에요. 그래서 내가 마지막이라고 하는 거요.”

-‘타는 목마름으로/ 숨어서 몰래 썼던/ 민주주의’, 지금은 ‘만세’를 부를 수준이 됐나요.
“어떤 점에선… 정치인들 X같은 소리들 마구 하는 거 봐도 그렇잖아. 웃기는 건 정동영·정몽준·이재오 말이요. 안 나오면 그뿐인 거지, 무슨 놈의 (불출마) 선언이야.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 많이 할 수 있는 게 민주주의 아니요?”

‘현재 거명되는 대선주자 중에 누가 가장 나은 것 같으냐’고 묻자 즉답으로 “안철수”란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출마할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자질로는 으뜸이라고 꼽았다. 안 교수를 빼면 다음은 누구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정색하고 “내 원수 얘기해도 돼요”라고 되묻곤 “박근혜가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박근혜의 리더십을 높이 사는 겁니까.
“자질은 모르겠고 민심이지. 내가 자꾸 달 이야기를 하는데 그거와 연관이 있는 거요. 달이 뭐예요. 여성이고, 물이고, 그늘이죠. 지난 3000년이 남성 지배 사회였다면 이젠 여자들이 이 세계를 주도적으로 끌고 나가는 역사적인 대변화가 오고 있어요. 달의 시대, 그걸 음개벽(陰開闢)이라고 해요. 문제는 누가 잘 보좌를 해야 되는데. 나는 안철수나 정운찬 같은 합리적인 사람하고 이원집정제로 가야 된다고 생각해요.”(뒤이어 기자가 다른 후보들에 대해 묻자 질펀한 욕설만 튀어나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해원(解寃)했나요.
“감옥에서 백일기도 할 때인데 박 대통령이 죽었다는 거예요. 그때 내 앞에 글자가 적힌 세 개의 공이 떠오릅디다. 첫 번째엔 ‘인생무상’, 두 번째 것엔 ‘안녕히 가십시오’, 세 번째 공엔 ‘나도 뒤따라갑니다’. 그런데 다음 날 추도식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추도사 첫마디가 똑같이 ‘인생무상’이었어요. 소름이 끼칩디다. 그때 풀었어요. 우리 먹고살게 하려고 애썼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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