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안철수의 장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안철수는 장고파(長考派)다. 서울의대 예과 2학년 시절 바둑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자 우선 바둑 책 50권을 모두 외웠다. 그리고 1년 만에 아마추어 정상급(1, 2단)에 올랐다. 열공 후 단기완성 방식이다. 수(手)를 놓기까지 장고하는 완벽주의자다.

 아마 정치도 이런 식으로 하는 듯하다. 지금은 열공 마무리 단계다. 이미 대한민국의 주요 정책결정에 참여했던 키맨(Key Man)은 거의 대부분 만났다고 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돕겠다’는 반응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교수가 정치참여 선언을 않고 있는 것은 나름의 소신과 전략이 있기 때문이다. ‘99% 확신이 들어야 약속한다’는 결벽증이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비결은 ‘지키지 못할 약속은 처음부터 안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90% 이상의 확신이 들어도 약속은 안 한다.

 지금쯤은 98% 정도의 확신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왜냐하면 이미 1년 전부터 주변에선 대권 도전 가능성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청춘콘서트를 같이 진행하던 법륜 스님과 시골의사 박경철, 그리고 정치판의 백전노장인 김종인 전 의원(현 새누리당 공동선대 위원장), 오래된 책사 윤여준 전 의원 등이 안 교수의 정치 참여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김종인 전 의원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지난해 5월부터 4개월간 안 교수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설득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안 교수가 “국회의원은 하는 일이 없는 자리”라고 거절하며 서울시장 출마를 언급해 결별했다고 한다. 당시에 대해 안 교수의 말은 다르다. 그는 “도와주겠다는 사람은 많다. 조언은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저는 나름의 판단이나 역사의식이 따로 있다”고 말했다. 기성 정치인과 안 교수는 서로 화법(話法)이 달랐던 것이다.

 ‘국회가 뭐 하는 곳이냐’는 안 교수의 반문은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이다. 그래서 안 교수는 국회보다 행정부를 생각했고, 서울시장을 생각했던 것이다. 이후 박원순 변호사에게 시장 자리를 양보했지만, 당초 생각했던 것은 대권이라고 봐야 맞다. 다만 “한번 몸담으면 적어도 10년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서울시장을 거쳐 대권으로 가는 2단계 스케줄을 생각했던 듯하다.

 1년 전이나 지금이나 안 교수의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이미 그때부터 나름의 상황판단과 자기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발점은 ‘사회의 혜택을 받았으니 그만큼 기여해야 한다’는 기부와 봉사의 철학이다. 그의 책과 강연을 보면 무수히 반복되는 포인트다. 실제로 백신 무료배포나 주식의 기부 등으로 이를 실천해 왔다. 기성 정치인과 다른 차원의 권력의지다. 그의 행동거지를 보면 마치 오래된 대권행보처럼 느껴질 정도다.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새누리당에 대한 ‘응징’ 의지는 확고하다. 전례가 없는 국내외적 위기 국면에서 필요한 새로운 리더십, 그 시대정신을 자부할 정도다.

 나름의 상황 판단은 청춘콘서트의 열기로부터 시작됐다. 안 교수는 “의자 다 차고, 계단 다 차고, 무대까지 다 차는” 현장의 열기에 많은 자신감을 얻은 듯하다. 이를 반영해주는 것이 여론조사 결과다. 지지율은 야권 1위로 요지부동이다(아래 표 1 참조). 더욱이 “(출마) 발표하면 난리 안 나겄나”는 부친의 말처럼 안 교수는 다른 후보와 달리 출마하면 지지율이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이길 가능성도 높아진다(표 2 참조).

 전략 역시 기성 정치와는 다르다. 안 교수는 사회적 상황변화를 얘기하며 “소셜미디어의 힘이 굉장히 강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둑으로 치면 소셜미디어가 승부처이자 급소란 얘기다. 급소를 차지하고 있으면 싸우기가 편하다. 불신받는 기성 정당 없이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이런 판단이라면 당연히 서두를 필요도 없고, 정당에 기댈 필요도 없다. 오로지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자신에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하면 된다. 안 교수는 1%를 채우는 자기 학습과 장고를 거듭하고 있을 뿐인데, 정치상황은 점점 유리해지고 있다. 야당 후보들의 지지율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정권 교체의 희망이 엷어지고 있다. 여당의 대권후보 경선은 김이 빠지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유권자들은 답답하다. 그러니 대권주자들이 줄줄이 나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마선언조차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기대감만 부풀어 오르고 있다. 안 교수가 과연 이런 기대감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안 교수의 열공이 성과를 거둬 훌륭한 리더로 거듭나길 바란다. 그러나 명심하자. 정치판에 메시아는 없다는 것을. 기대만큼 실망이 클 수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