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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똥, 보리자, 보리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5호 27면

가끔 들르는 그 암자에는 허리 높이의 소담스러운 보리똥나무가 마당 가운데 분재처럼 잘 다듬어진 자태를 뽐냈다. 시절을 제대로 맞추어 도착한 덕분에 짙푸른 바탕빛의 잎새 위에 붉게 익은 열매가 주는 대비감이 더욱 도드라진다. 그야말로 푸른 비단 위에 붉은 꽃을 더한 모습이다. 약간 시큼하면서도 텁텁함은 개량하지 않는 원초적인 맛을 입 안에서 터트렸다. 하지만 몇 개를 계속 먹다 보면 또 그 맛에 길들여져 계속 손이 간다. 유실수가 아니라 관상수임을 알기에 적당할 때 멈추지 않으면 애지중지하며 정원을 관리하는 이의 눈총까지 감수해야만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보리수(甫里樹) 열매가 익은 후에 잘 밀봉해 올려 보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미루어 보건대 과일이라기보다는 약재의 용도로 사용한 것 같다. 관상수도 유실수도 아니고 실상은 약나무였다.

삶과 믿음

토종 보리똥나무는 보리가 팰 무렵 꽃이 피고 보리가 익을 무렵 열매도 익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보리똥나무는 그 이름에서 연상되는 힘들었던 시절의 보릿고개와 까칠한 보리밥의 이미지가 자기에게 덧씌워지는 것을 거부했다. 어느 날 ‘보리’에는 ‘깨달음(菩提·bodhi)’이란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뒤의 일이다. 게다가 비호감의 ‘똥’이라는 글자마저 떼내고서 ‘보리수’라는 애칭으로 불러주길 원했고 또 그렇게 됐다. 드디어 보리(甫里)는 보리(菩提)가 된 것이다.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는 보리자(菩提子)나무는 키도 크고 잎도 넓고 열매도 많았다. 주로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곳은 큰 기와집이 즐비한 사찰 경내였다. 게다가 고려사는 “명종 11년 묘통사(妙通寺) 남쪽에 있는 보리수가 표범의 울음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해 신령스러움까지 갖춘 나무로 묘사했다. 또 열매는 염주로 만들어져 선남선녀의 손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 격에 맞는 이름만으로 신분 상승을 도모하고자 했다. 보리자나무에서 뭔가 촌스럽게 들리는 ‘자(子)’자를 솎아냈다. 그리하여 고상하면서도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인 ‘보리수’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보리똥과 보리자의 보리수는 얼마 후 자기 이름이 결국 짝퉁이란 사실을 확인했다. 인도 보드가야에서 만난 오리지널 보리수는 참으로 장대했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가 그 자체로 숲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보리똥과 보리자가 뿌리로 삼고 있는 보리수라는 그 이름이 참으로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고양이가 호랑이를 만났을 때의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 나무도 본래 이름은 피팔라(pipala)였다. 그 자리는 청년 붓다가 깨달음(보리)을 완성한 현장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피팔라’ 대신 ‘보리수’라고 불리게 됐다. 어쨌거나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중요한 건 스토리와 내용이다. ‘보리똥’이면 어떻고 ‘보리자’면 어떻고 또 ‘보리수’면 어떠랴.

여름 초입임에도 땡볕은 마사토로 뒤덮인 절 앞마당을 달군다. 참배객들은 큰 법당 앞의 두 그루 커다란 보리수(보리자나무) 그늘 밑에서 삼삼오오 앉아 낮은 목소리로 소곤대며 깔깔거리고, 진중한 몇 명은 외따로 자기를 돌아보는 명상시간을 갖고 있다. 이제 밤꽃처럼 보리수도 꽃구름을 하얗게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했다. 멋과 향이 가득한 저 보리수 꽃이 질 무렵엔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될 터다.



원철 한문 경전 연구 및 번역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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