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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사람 ⑫ 제주도 향토음식 명인 김지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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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제주 향토음식 돌우럭 콩조림을 들어보이는 김지순 명인의 웃음에는 고향의 맛에 대한 넉넉한 사랑이 배어 있었다.

제주도는 유배지였다. 남쪽 바다에 외로이 박힌 화산섬은 먹을 게 귀했다. 풍랑이 심한 바다에서 뱃사람은 제 목숨을 담보로 갯것을 건져냈다. 뭍에서 유배 온 선비들은 섬사람이 나눠준 식량으로 연명해야 했다. 매끼니가 고비였다.

지난달 30일 제주도에서는 조선시대 유배 밥상을 재현한 전시회가 열렸다. 봄철 멜국(멸치국)이며 여름철 냉국 등 계절별로 정갈하게 차려낸 밥상은 단출하지만 되레 건강해 보였다. 유배인의 문헌과 편지글을 되짚어 옛 제주도 밥상을 차려낸 주인공은 김지순(76)씨다. 그는 2년 전 제주도 향토음식 명인 1호로 선정됐다. ‘제주 유배 밥상’을 더 널리 많이 먹이고 싶다는 김씨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 또한 우리 문화니까요.” 대답이 손맛만큼이나 야무졌다.

글=나원정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먹거리 귀한 화산섬의 음식문화 육지와 달라

제주 토박이 김지순 명인은 스무 살이 넘어서야 제주 음식이 별나다는 걸 깨달았다. 1957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과에 입학한 그는 서울에서 1년간 신세를 지기로 한 댁에서 첫술을 뜨고는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

“집주인이 평양 출신이라 음식이 무척 깔끔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어도 그냥 안 잡수시고, 베주머니에 싸서 돌로 눌러 편육을 만들었어요. 제주도에서는 삶은 돼지고기를 돔베(도마)에 올려 바로 썰어 먹거든요. ‘돔베고기’와 천양지차의 세계에 눈뜬 셈이지요.”

교통이 점차 편해지면서 제주도에는 관광 붐이 일었다. 외지인의 입맛에 휘둘려 제주 향토음식은 제 빛깔을 잃었다. 그런데도 섬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겹던 시절이었다. 김지순 명인은 제주의 맛을 잃어버리는 게 안타까웠다. 제주도 안팎을 오가며 제주 향토음식을 연구하던 그는 1985년 제주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요리학원을 열었다. 고향의 옛 맛 찾기에 인생을 건 것이다.

-제주 향토음식이라면?

“제철 식재료를 이용해 원재료 맛을 십분 살리는 음식이다. 원래 제주도는 간장, 된장 문화다. 매운맛을 내려면 풋고추를 직접 썰어넣지 고춧가루·고추장은 별로 안 썼다. 된장도 끓이거나 졸이지 않은 날된장이다. 장독에서 그대로 푼 날된장을 쌈도 싸먹고 반찬으로 먹었다.”

-제주도는 배고픈 역사가 왜 그리 긴가?

“농사가 잘 안 돼서 1960년대 초만 해도 쌀과 물을 구하기 어려웠다.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 예순여섯에 제주도로 유배를 와서 조밥에 된장뿐인 밥상을 받고 ‘이게 사람 먹는 음식이냐’고 혀를 찼단다. 그럴 만큼 궁했다. 제주산 방게를 갈아 넣은 깅이죽(게죽)을 옛 방식대로 끓이면 몽글몽글 덩어리가 진다. 쌀이 아까워서 혹여 으깨질까 봐 살살 젓다 보니 생긴 별미다.”

-제주도에는 음식문화랄 게 없다는 목소리도 있는데?

“어떤 학자가 제주도에는 생활만 있다고 하더라. 하지만 선조가 깨진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었다면 그게 우리 문화 아닌가.”

-제주도의 음식 문화라면?

“제주도에는 대물림되는 종갓집이 없다. 대신 씨족 단위로 마을이 발달해 옆집에 생판 남이 이사와도 이모, 삼촌 그랬다. 다들 못 입고 못 먹어서 반상(班常) 구분도 없었다. 밥을 낭푼(양푼)에 한꺼번에 담아 국만 따로 떠서 둘러앉아 먹었다. 제사음식을 음복할 때도 사람 수대로 나눠 먹었다.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똑같이. 제주도 향토음식은 그래서 다 서민음식이다.”

제주 전통조리법 원형 그대로 전하고 싶어

제주도 해비치 호텔 ‘하노루’에서는 김지순 명인이 참여한 제주 향토음식을 맛볼 수 있다. 쑥 가마솥밥과 돌우럭 콩조림 등이 나오는 제주식 낭푼밥상(사진·3만 5000원) 등 15가지 향토음식이 마련돼 있다. 세금·봉사료 별도. 064-780-8311.

1년여 전부터 김지순 명인은 제주특별자치도와 함께 향토음식 도록을 만들고 있다. 제주도 전통 조리법을 원형 그대로 재현·복원해 발표하는 작업이다. 그러면서 그는 제주 향토음식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제주 방언에는 우리네 고어가 여럿 남아 있어요. ‘골곰짠지’는 엿기름에 찹쌀을 끓여 무말랭이, 말린 고추를 무친 음식이에요. ‘골’은 제주 방언으로 엿기름이란 뜻인데, 인터넷에서 골곰짠지를 검색하면 레시피에 엿기름이 없어요. 제주 향토음식이 원형 그대로 전해지지 않아 생기는 일이죠.”

-제주 향토음식에 대한 포부는.

“제주 향토음식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제주도 음식 중에 ‘몸국’이 있다. 돼지고기 삶은 국물에 돼지 수육과 모자반을 넣고 끓인 것인데 돼지 내장이 들어가서 향이 독특하다. 세계적인 3스타 셰프 장 조지가 그걸 두 그릇이나 비웠다. 어릴 적 프랑스에서 먹던 어머니의 맛이라면서 절대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한식이 세계화하는데 제주도라고 못할 게 뭐 있나. 요즘 입맛을 감안해 조금만 다듬으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승산이 있을 거라 본다.”

 
김지순 1936년 제주도 출생. 홀어머니와 할머니 슬하에서 제주의 손맛을 깨쳤다. 1970년대 유명 요리연구가 왕준련(1918~99) 선생을 만나면서 정식으로 요리 외길에 들어섰다. 제주도에 있는 자신의 요리학원과 한국식생활연구소, 제주향토음식보존연구원 등에서 활동하며 제주 향토음식 연구와 보존에 힘써 왔다. 2010년 최초의 제주도 향토음식 명인으로 선정됐다.

김지순 명인 추천 제주 향토맛집

●장춘식당 해물뚝배기(1만 2000원)·돔베고기(3만 원) 등 제주의 맛을 제대로 낸다. 주인장이 워낙 깔끔해 정갈한 제주식 한정식을 대접받는 기분이다. 제주시 연동 삼무공원 동남쪽 골목 안. 064-742-8556.

●순옥이네명가 여주인이 해녀고 남편은 전복 전문 도소매상이다. 제주도에서 전복이 가장 저렴하고 푸짐한 곳. 전복찜 큰 것 5만 원, 전복뚝배기 1만 5000원. 제주시 도두동 도두항 가는 길목. 064-743-4813.

●홍소반 관광객은 잘 모르는 제주 밥집. 제주사람의 밥상을 약간만 다듬어낸 정식(9000원)이 별미다. 장도 주인이 손수 담근다. 전복뚝배기 1만 5000원. 예약필수. 제주시 이도2동 제주학생문화원 동쪽 골목 안. 064-723-5567.

●국수마당 제주시 삼성혈 앞에서 자연사박물관을 거쳐 500m가량 이어지는 국수거리에서 지금 가장 인기인 곳. 돼지육수에 수육을 올려 만든 제주 명물 ‘고기국수’(5000원) 추천. 국수는 무한리필. 몸국 6000원. 064-757-5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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