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다리 선생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3호 34면

얼마 전 나는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우리 3학년 때 2반 담임이셨던 이학근 선생님이 서울에 오신다고 해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일요일 저녁 7시. 장소는 종로 5가. 3학년 2반 친구들은 많이 와다오. 학다리 선생님이 반가워하실 거다.” 선생님은 나를 그다지 반가워하실 것 같지 않았지만 나는 선생님 소식이 반가웠다. 선생님께 인사드릴 수 있으니까.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스승이 없는 사람은 불우하다. 가령 스승의날이 되어도 찾아뵐 선생이 없는 사람은 불우하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선생을 만났던가. 둔하고 어리석으며 게으른 내가 이나마 사람 흉내라도 내며 살고 있는 것은 다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깨우침 덕분이다. 그런데도 나는 선생님들과 계속 연락하지 못했다. 사람 사귐에 어둡고 스승을 모시고 따름에 능하지 못한 탓이다.

사모님과 함께 나타난 선생님은 30년 전 모습 그대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길었던 머리가 사뭇 짧아진 정도랄까. 제자인 내가 선생님보다 더 늙은 것 같아 송구하고 민망했다. 선생님은 먼저 손을 내밀어 제자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그만 선생의 손부터 잡았다. 크고 따뜻한 손이다. 내 이름을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그래, 상득이”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데 꼭 조례시간에 출석을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예” 하고 대답하고 싶었다.

선생은 자리에 앉아 제자들 얼굴을 쭉 둘러보더니 “그래 다들 명함 한번 꺼내 봐라”고 말했다. 그건 마치 숙제 검사를 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 고등학교 졸업하고 30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가르친 대로 성실하게 살고 있는지 어디 숙제들 한번 꺼내 봐라 하고 말이다. 3일 연휴의 중간 일요일이라 친구들이 많이 참석하지는 못했다. 나까지 해서 겨우 여섯 명이었다. 은행 지점장, 대학 교수, 대기업 상무, 증권사 상무, 광고회사 대표.

다들 숙제를 잘한 것인지 선생님은 제자들의 명함을 하나씩 받아 보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내 차례다. 선생은 내 명함을 보고는 뜻밖이라는 듯 놀란다. “상득이는 그래 어떻게 이곳에 들어갈 생각을 했지?”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닌데도 나는 마치 숙제 안 해온 핑계를 대듯 중얼중얼 말한다.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선생님은 건배를 청한다.

선생님은 참석하지 못한 제자들의 근황도 하나하나 챙긴다. 30년 전의 이름들일 텐데 잊지 않고 세세한 것까지 기억한다. 반면에 나는 선생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국어를 가르쳤고, 야간 자습시간이면 두꺼운 책을 들고 들어와 말없이 독서하던 모습 정도가 전부다. 사모님은 우리가 졸업한 해에 모교로 부임한 국어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나는 사모님과 몇 마디 나누자마자 금세 깨달았다. 선생님이 아니라 사모님에게 배웠더라면 아마 국어공부를 훨씬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하고.

9시 반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사모님이 묻는다. “한 달 뒤에 또 서울 올 건데 전화해도 되겠죠?”
자녀 결혼상담일까? 나는 “물론이죠” 대답한다. 헤어지면서 선생님은 또 악수로 인사를 대신한다. 두 분은 늦봄의 서울 거리를 좀 걷다가 들어가겠다고 한다.
지하철역으로 가다가 누군가 선생님의 별호가 왜 학다리였는지 물었다. 글쎄, 돌아보니 선생님 부부는 한 쌍의 학처럼 우아하게 건널목을 건너는 중이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