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밀 유출한 교황 집사 구속 … 교황청 은행장 해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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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베르토네 추기경(左), 소다노 추기경(右)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어야 할 오순절에 바티칸이 발칵 뒤집혔다. 교황청 내부 문서 유출 스캔들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전체 권력 관계를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일간 라 리퍼블리카는 28일(현지시간) 익명의 관계자를 인용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에토르 고티 테데시 바티칸은행장의 해임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테데시 은행장은 지난 24일 “은행의 지배구조에 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이유로 불신임을 받았다. 소식통은 “당시 교황은 눈물을 보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공식명칭이 종교사업협회인 바티칸은행은 사실상 교황청의 금고 역할을 맡고 있다.

 가톨릭 우애 공제회 대표이자 은행 이사회 멤버인 칼 앤더슨도 “테데시는 기본 책임 수행에 실패했다. 오히려 은행을 더욱 투명하게 만드는 데 장애물이 됐다”고 밝혔다. 관측통들은 테데시가 바티칸은행의 투명성 제고를 추진해온 것에 대해 이사회가 제동을 건 것으로 보고 있다. 2009년 테데시를 발탁한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에게도 악재다. 현재 국무원장인 베르토네 추기경이 교황의 오른팔이 지만 전 국무원장인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과 세력다툼을 하고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인 탓이다.

 이 와중에 2006년부터 교황의 아파트에서 일해온 집사인 파올로 가브리엘레가 26일 기소됐다. 바티칸과 이탈리아 업체 사이에서 이뤄진 부패 의혹이 담긴 내부 문서를 불법으로 소지하고 언론에 유출한 혐의다. 가브리엘레는 현재 바티칸 경찰사무소 내 안전방에 구금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가 교황청 내 권력 암투와 유출 사건을 엎기 위한 희생양으로 이용되고 있는 분석도 있다. 라 리퍼블리카는 또 다른 소식통을 인용해 “진짜 브레인은 추기경들이다. 나머지 비서 등 아랫사람들은 모두 잔챙이”라며 배후에 조종 세력이 있음을 암시했다. 소식통들은 "추기경 중 한 명이 유출자가 분명하다”며 "그걸 밝힐 수 없으니 문서를 배달한 가브리엘레를 체포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La 7 방송은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가 바티칸 시국 행정처장이었을 당시 교황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하며 고위 성직자들이 친밀한 업체만 선별해 계약을 맺고 가격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부정을 일삼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후 바티칸은행의 돈세탁, 교황 암살설 등 내부 문서들이 속속히 공개되며 폭로전문사이트 위키리크스에 빗대 ‘바티리크스’로 불리기도 했다. 최초 보도를 했던 기자 잔루이지 누치가 지난주 유출 문서와 편지 등을 토대로 교황청 내부의 권력투쟁과 비리를 묘사한 『히즈 홀리니스(His Holiness·聖下)』를 출판하면서 의혹은 더욱 커지고 있다.

민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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