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법정에서 싹튼 희망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2호 31면

오래 전, 형사재판을 담당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유죄판결을 선고했던 피고인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여성과 모텔에 들어갔다가, 성폭행을 하였다는 범죄로 3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는데, 유무죄를 가리느라 꽤 고심했던 사건의 피고인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에 취한 채 분위기에 휩쓸려 잘못을 하였고, 전과가 없으며 착실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무척 안타까웠다.

나는 그에게 형을 선고할 때 ‘피고인이 잘못을 하였지만, 원래는 착실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되찾을 것으로 믿는다’는 취지의 말을 했던 것 같다. 피고인은 편지에서 ‘비록 엄한 형을 받았지만 자신의 본래 성품을 믿어주고 격려해줘 교도소에서 희망을 갖고 살 수 있게 되어 진정으로 고맙다’고 했다. 나의 몇 마디 말이 성범죄자가 되었다는 수치심과 모멸감에서 벗어나 희망을 갖는 싹이 되었다는 것이다. 법관으로서 이런 경우만큼 감사함을 느낄 때는 없다.

소송법상으론 판결 선고 때 피고인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법관에 따라 상당히 차이가 난다. 자세히 설명하는 경우부터 최소한의 근거만 간략히 알려주는 법관도 있다. 나는 법관 경험이 쌓일수록 형을 선고할 때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형벌을 복역해야 하는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에게 내려진 형기(刑期)의 근거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설명이 치유적 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고인의 환경이나 성격에 관한 자료를 통하여 그의 상태를 이해하고, 공감을 느끼며 희망적인 요소를 지적하고 격려해 주면 그에게 큰 힘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판결을 선고할 때 이러한 점을 메모하여 말을 해주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반대로 집행유예로 용서해주는 피고인에게는 회피적 태도와 유약함 등을 지적하며 호되게 나무라기도 하였다. 그래서 선고시간이 상당히 긴 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말들이 대부분의 피고인에게는 헛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형기가 얼마나 될지 불안한 상태에서 이러한 사설(辭說)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실제로 중형이 선고되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심지어는 재판부를 독한 눈초리로 노려보는 피고인들도 적지 않다. 극소수의 피고인에게만 이러한 말이 도움이 되겠지만, 단 한 사람에게라도 힘이 된다면 할 만하지 않은가. 그 피고인의 편지에 감동을 받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국에는 마약중독자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형벌 대신에 특별한 중독치유 프로그램을 받도록 하는 마약법정이 있다. 일정 기간 동안 대상자가 상담, 봉사활동, 마약검사 등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이를 성실하게 마치면 형을 면제시켜 주는 것이다. 대신에 이를 지키지 않으면 형사절차로 보내어 형벌을 받게 한다. 이 과정에 사회복지사, 보호관찰관이 함께 지도를 하며, 판사가 정기적으로 훈련 상태를 감독한다.

이에 관한 인상적인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마약중독자였던 청년이 이 과정을 끝내고 졸업식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가 재판을 받던 법정이 꽃다발과 웃음이 가득 찬 졸업식장으로 변했다. 담당 판사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청년을 포옹하고, 그를 돌보던 백발의 사회사업가와 보호관찰관, 가족, 친구들이 기뻐하였다. 백미는 청년이 법대 앞에 서서 졸업식 소감을 말하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마약으로 엉망으로 살았지만, 힘든 재활훈련을 이겨내면서 용기를 얻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하였다. 그때 그의 부모는 눈물을 흘렸다. 법원이 프로그램을 끝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졸업식을 성대하게 열어주는 것 자체가 놀랍지만, 이러한 예식이 본인에게 매우 큰 치유적 효과가 있다고 한다. 지인들 앞에서 새롭게 발견한 자신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간절히 자신의 의미와 생존 근거를 찾는 깊은 욕구가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도 예외 없이 이러한 의식을 갖고 있다. 이를 일깨워 자신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는 일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을까. 희망을 일깨우는 몇 마디 말이 내면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빛으로 타오르는 사실은 신비에 가깝다. 우리 주변에 희망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윤재윤 춘천지방법원장을 마지막으로 30여 년간의 법관생활을 마쳤다. 철우언론법상을 받았으며, 수필집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를 펴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