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수 없어 서류 외우는 최 판사처럼 책임감과 투혼 있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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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재판을 진행중인 시각장애인 최영 판사.

우리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타인을 평가하면서 삽니다. 외모나 목소리 등 외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평가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죠. 학생의 경우는 상대방의 성적이 나보다 높은지, 낮은지를 슬쩍 가늠해 보기도 하고요.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나요? 물론 머릿속으로야 ‘신체의 장애는 장애가 아니다, 마음의 장애가 진정한 장애다’라고 외치고 있겠지만 글쎄요, 이런 지식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네요.

선진국 시민들은 장애인을 배려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고 해요. 어떤 편의시설을 이용할 때든 장애인이 우선권을 갖습니다.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죠. 뭐든 경쟁하고 빨리빨리 성과를 내야 하는 강박관념이 있는 탓인지, 우리는 아직도 장애인을 소외시키고 그들을 걸리적거려 하곤 하죠. 그래서 외국에서 성공을 거둔 장애인보다 우리나라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진 장애인이 더 위대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더 척박한 환경을 이겨냈다는 의미니까요.

오늘 만나 볼 인물은 1급 시각장애인으로 법조인이 된 최영 판사입니다. 그가 진행하는 재판 모습이 지난 11일 최초로 공개됐다는 기사가 실렸네요.

눈이 안 보이는 최영 판사는 재판을 어떻게 진행할까요. 선생님은 대법원에 가서 재판 진행 과정을 참관한 적이 있는데, 검사와 변호사가 주장을 펼칠 때 판사는 끊임없이 관련 서류를 뒤적이며 그들의 이야기와 자료를 맞춰가며 부족한 점을 짚어내고 보충 자료를 요구하기도 하더군요. 판사가 내리는 판결에 따라 원고와 피고의 삶이 바뀔 수 있으니 굉장히 긴장한 모습이었어요.

최영 판사는 서류를 뒤적이는 대신 노트북에 연결된 이어폰을 끼고 재판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서면 자료를 읽어주는 음성 프로그램을 활용하기 위해서죠. 재판 준비도 다른 판사들과 차이가 있어요. 재판 준비 실무관이 소송 기록을 일일이 읽어준다고 해요. 증거 사진 등 이미지는 그림을 그리듯 자세히 묘사해 설명해 줍니다. 주변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최영 판사는 재판 관련 자료를 두 번만 들으면 모조리 외워버린다고 해요.

그에게 “시각장애인이라서 판사 일을 하는 게 불편하지 않으냐”고 묻자, “판사로 임용되기 전까지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두려웠는데, 지금은 법관이라는 직업이 주는 무게감과 책임감이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다”고 답했어요.

선생님은 이 기사를 읽고, ‘신체의 장애는 단지 불편함일 뿐이다’라는 말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됐어요. 그리고 직업에 대한 사명감,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배웠답니다. 최영 판사가 관련 서류를 두 번만 듣고 외워버리는 건 시각장애인이 갖는 특별한 능력은 아닌 것 같아요. 자신의 판결이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에 투혼을 발휘하는 게 아닐까요?

여러분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어떤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공부든, 운동이든, 잘해야 하지만 잘하기 힘든 여건에 놓여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쁜 조건을 바라보기 전에, 그 일에 책임감을 갖고 투혼을 발휘해 보길 응원합니다.

▶2012년 5월 12일자 중앙일보 10면 ‘마음의 눈으로 판정합니다’

심미향 숭의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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