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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비주류가 불법 사찰 불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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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세상 사람이 다 아는데 이명박 대통령(MB)만 모르는 게 있다. 불법 사찰의 정치적 몸통 의혹이 MB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법적 책임이야 검찰 수사를 통해 가릴 일이다. 하지만 정치적 책임은 어차피 MB가 짊어져야 할 운명이다. 정치에선 팩트(사실)보다 이미지가 훨씬 중요하다.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내가 몸통”이라며 울부짖고, 총선 때 청와대는 “사찰 자료의 80%는 노무현 정부 작품”이라는 물타기로 어물쩍 넘어간 듯이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MB를 향한 싸늘한 시선은 거둬지지 않고 있다.

 김연광 전 청와대 정무1비서관은 연초에 청와대 근무 때의 뒷이야기를 담은 책을 냈다. 그 속에 지난해 1월 MB가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의 낙마에 격앙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정치인들은 얼마나 깨끗하다고 시비하느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며 “내가 그 사람을 왜 지명했는지 아느냐. 한양대 출신이다. 완전히 비주류다. 그런 사람이 그 자리에까지 올라가려고 얼마나 자기 관리를 잘 했겠느냐”고 분노했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이 ‘비주류(非主流)’다.

 당시 민정수석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자신들이 총리실의 공직윤리지원관실 설치를 인지한 시점은 2008년 9월이다. 그것도 경제수석실을 통해서였다. “그쪽 예산을 넉넉히 배정하라”는 압력이 쏟아진다는 소문이 난무했다. 뒤늦게 민정실 비서관과 행정관들이 들고 일어났다. 검찰·경찰·국세청 출신으로 이미 2~3차례 청와대 근무를 경험한 베테랑이 많았다. 이들은 양날의 칼인 ‘사찰’, 그 무서움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당연히 “보고와 지휘는 우리가 맡아야 한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민정수석이 바로 정동기씨다.

 정 수석은 한 번도 청와대 근무나 공무원 감찰을 다뤄본 경험이 없었다. 그럼에도 비서관과 행정관들의 성화에 못이겨 대통령실장을 거쳐 채널 변경을 건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일 잘 하는데 왜 흔드느냐”는 싸늘한 질책 뿐…. 이후 이 비서관과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성역으로 남게 됐다. 이 비서관은 이듬해 다른 비서관실에서 “이XX들 똑바로 해”라며 행패를 부렸지만 멀쩡히 살아남았다. 정 수석은 나중에 산하 비서관들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내가 원래 비주류 아닌가. 무슨 힘이 있겠나….” 여기에도 ‘비주류’라는 한탄이 눈길을 끈다.

 공직 감찰은 역대 정권이 다 했으며, 당연히 필요한 기능이다. 문제는 법적 권한이 없는 비선라인이 민정수석실을 제치고 지휘하는 바람에 사(私)조직으로 변질된 것이다. 정상적으로 민정실이 지휘했다면 파문이 이만큼 커지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당시 민정실 관계자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 “원래 우리가 하는 일이 대통령을 위해 합법과 불법 사이의 미묘한 회색지대에서 움직인다. 그쪽 친구들이 자구책으로 사찰 서류를 개인적으로 빼돌린 것부터 한심하다. 아마추어들의 코미디다. 민정실 컴퓨터에는 사적인 데이터 출력을 막는 기밀 프로그램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비주류라는 단어는 애틋한 감정을 끌어낸다. 일을 잘 하는데도 억울하게 차별당하는 느낌이 담겨 있다. 따라서 비주류 인사가 발탁되면 일단 환호를 받는다. 문제는 임명된 다음이다. 주류처럼 일을 처리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다. 불법 사찰은 ‘영포라인’의 전횡으로만 볼 사안이 아니다. 어쩌면 MB의 비주류를 향한 빗나간 애정이 부른 재앙일지 모른다. 그 밑에는 효율과 성과만 따지는 기업 경영과, 절차와 제도적 장치를 따라야 할 국가 경영에 대한 혼선이 도사리고 있다.

 드디어 공직윤리지원관실의 ‘VIP(대통령)에게 일심으로 충성하는 친위(親衛)조직’이란 지휘 문건까지 공개됐다. ‘누구 잘라라’ ‘누구는 확실히 날려야 한다’는 낯뜨거운 치부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국민 세금으로 흥신소나 다름없는 뒷조사를 일삼은 것에 마음 편할 납세자는 없다. 2년간 불법 사찰 사건이 온 나라를 들쑤시면서 우리 사회의 인내심도 바닥을 보이고 있다. 슬슬 짜증을 내는 분위기다. 이제 MB가 말문을 열었으면 한다. 사과에도 용기가 필요하고, 진심 어린 고백이 박수를 받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