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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그늘 앉아 먼 산을 즐긴다 … 집 옥상에 ‘무릉도원’ 만든 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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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 김한배(오른쪽) 교수 부부의 휴식 시간. 관목들로 둘러싸인 옥상정원에 앉아 아내는 연주하고 남편은 책을 읽는다.

우면산 기슭 3층집 옥상 132㎡ 공작단풍·배롱나무·수국·모란… 금실 좋아진다는 자귀나무도
눈 내린 다음 날, 유리집 앉아 우면·관악산 바라보죠 ‘오직 눈 뿐인’ 설원을 그리며…

‘닥터 지바고’란 영화가 있었다. 러시아 설원에서 펼쳐지는 지바고의 이야기는 1970년대 청춘을 보낸 이들의 정서를 암암리에 지배했다. 컬러TV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영화의 힘은 컸다. 상상력의 촉수가 한창 예민하게 벼려졌던 시절, 대형 스크린으로 마주쳤던 전쟁, 사랑과 이별, 눈과 봄과 꽃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서울 방배동 전원마을의 ‘단설헌’ 주인 김한배(57) 교수도 그랬던 모양이다. 단설헌의 의미를 물었을 때 그는 “오직 눈뿐인 집”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와 비슷한 무렵에 청춘을 보낸 나는 ‘오직 눈뿐’이란 말에서 반사적으로 지바고의 설원을 연상했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지바고 이야기를 꺼냈다.

“닥터 지바고가 패잔병이 되어 천신만고 도달했던 옛집 기억나십니까? 낡은 책상에 앉아 ‘라라’라는 시를 썼던 그 장면 말입니다.” 물론 기억하고 말고다. 지바고가 ‘RARA’라고 쓸 때 러시아 대문자 R이 거꾸로 뒤집어지던 모습도 생생하다. 잉크가 종이 안으로 스며드는 정밀한 시간, 집 바깥에선 늑대가 우워어~ 울었었다. 그 장면의 커다란 나무책상은 내 오랜 동경의 목록 중 하나였다. 그 집의 담벼락은 세 번째 벽돌을 빼낼 수 있게 돼 있고 그 벽돌 뒤에 열쇠가 숨겨져 있었지. 나 또한 한때 그런 방식으로 열쇠를 숨겼었다. 단설헌 서재에 놓인 책상이 바로 그 지바고의 책상인 것을 나는 대뜸 알아봤다. 이쯤 되면 우리 이야기는 한층 풍요로운 지평을 얻는다. 내가 이 칼럼에서 찾고자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들인 것을!

“그 장면이 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절대고독, 견고한 정신세계 같은 것들, 그런 공간을 원했습니다. 아무튼 결혼하고 전셋집에 살 때부터 집 이름을 쭉 ‘단설헌’이라고 불렀으니깐요. 오직 눈뿐인 집이란 미니멀한 집이기도 합니다. 고요하고 절제된 집을 원했지요. 정원도 집 이름에 걸맞게 미니멀하게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원래 단설헌을 구경 갈 때 염두에 둔 것은 그 집의 정원이었다. 서울시립대 조경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김 교수는 전공이 조경설계다. 조경설계 전문가가 만든 자기 집 정원은 과연 어떨까.

정원은 현대 한국인의 로망이다. 그렇지만 도저히 이루기 어려운 로망이다. 도시 땅값이 비싼 데다 주거의 대부분이 아파트가 되다 보니 1970, 80년대만 해도 당연했던 자그만 안뜰이 이제는 언감생심 갖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았다. 단설헌은 그 안뜰을 지붕 위에다 만들었다. 땅이 좁으니 바닥에는 만들 수 없고 옥상에 흙을 채워 나무와 풀을 심었다. 거기서 별도 보고 노래도 하고 식사도 하고 친구들을 불러 작은 음악회도 연다.

“제 전공이 조경설계지만 우리 정원은 외려 설계의 요소를 최소화하고 대신 주변 경관을 최대한 끌어들였어요. 앞은 관악산, 뒤는 우면산으로 둘러싸인 것이 이 전원마을의 특징입니다. 낮은 마당에선 앞집이 산을 가려 덜 보이지만 옥상에선 사방이 탁 트여 최고의 조망이 나오거든요. 옥상정원은 대지면적이 여의치 않은 도시형 주택에서 앞으로 진지하게 고민해볼 만한 정원 구성이지요.”

옥상정원에 만든 자그만 연못. 여름이면 이 못에 열대어를 기른다. 이런 연못은 기성품이 나와있어 흙 속에 묻기만 하면 된단다.

단설헌 정원은 정원 그 자체보다도 주변의 경관을 끌어들인 조망정원이다. 풍경을 끌어들이는 차경(借景)은 우리 전통의 조경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무는 되도록 적게 심고, 심더라도 키 작은 관목 위주로 했다. 대신 테마를 확실히 부여했다.

“옥상정원이라 아무래도 여름에 덥지요. 그래서 시원한 남국 분위기가 나는 나무를 심었어요.” 그렇게 골라진 수종이 공작단풍·자귀나무·배롱나무·대나무·수국·백모란 같은 것들이다. 꽃이 피어도 현란하지 않은 나무들이다. 대신 들여다볼수록 수형이며 이파리며 물성이 더 고와지는 나무들이다.

“자귀나무는 합환수라고 해서 밤이 되면 마주 보는 이파리들이 서로를 꼭 껴안아요. 집 안에 심어놓으면 부부금실이 좋아진다지요.”

우리 모두 뜰 안에 합환수 한 그루쯤 심어놓고 살 일이건만! 그럴 공간을 잃어버려서 이 땅엔 곳곳에 ‘무언가족’이 늘어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방 울타리엔 생명력이 강하고 향이 빼어난 인동덩굴을 싫도록 올렸다.

“어렵지 않습니다. 슬라브 지붕 위에 배수판을 깔고 그 위에 흙이 빠지지 않도록 퀼트(부직포 같은 헝겊)을 덮고 하중이 덜 나가는 경량토를 채운 뒤 나무를 심으면 됩니다. 키 큰 나무는 흙높이가 1.2m 이상 돼야 하지만 관목은 60㎝ 정도, 초화류는 30㎝, 잔디는 15㎝만 깔아도 충분합니다.”

2 옥상정원에 앉으면 우면산이 코앞까지 다가온다. 봄부터 가을까지 부부는 이곳에 나와 차
를 마신다. 3 아내의 가야금 방. 4 지바고같이 커다란 목제책상이 있는 남편의 서재. 공부하다 지치면 곁에 놓인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린다.

단설헌이 놓인 방배동 전원마을은 우면산 기슭에 놓인 아담하고 운치 있는 동네다. 서울에선 드물게 낮은 단독주택들이 200여 호 이상 모여 있다. 지난해 여름 예상 밖의 폭우가 쏟아져 골목 안까지 토사가 밀려드는 피해를 보기도 했으나 발 빠른 복구작업으로 이제 거의 상처를 회복했다. “외부에서는 숨겨져 있으나 내부에서는 별세계의 경관이 열려 있는 무릉도원형 마을입니다. 얼마 전 타계한 저명한 건축가 이타미 준도 이 마을에 살았지요. 30년 이상 된 집들이 많아 집집마다 나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의 최근 주택정책에 의해 저층형 휴먼타운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도 갖고 있지요.”

단설헌은 꽤 실속 있는 집이다. 전원마을은 낡은 집이 많은 동네지만 단설헌은 몇 해 전에 3층집으로 새로 지었다. 아래층은 세를 주고 꼭대기층에 집주인이 살도록 만든 구조인데 옥상에 정원을 들여 생활공간을 두 배로 넓혔다. 대지 294㎡(89평)에 옥상정원 면적이 132㎡(40평) 정도 된다. 봄부터 가을까지 부부는 실내보다 정원에 있는 시간이 더 많다. 나날이 자라나는 새싹들과 다달이 피어나는 꽃들을 보는 재미가 그 어떤 오락보다 즐겁기 때문이다.

명색이 단설인데 눈은 언제 보느냐고? 겨울을 위해 따로 마련한 장치가 있다. 정원과 집을 잇는 계단참에 만들어둔 유리집이 그것이다. 눈 내린 다음날 이 유리집에 앉아 바깥을 내다볼 때 단설헌은 글자 그대로 단설(但雪)이 된다. 복사열로 햇살은 따뜻한데 바깥 우면산과 관악산에 설원이 펼쳐질 때 단설헌은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이런 방을 흔히 선룸이라고 불러요. 바깥과 환하게 연결되는 시적 공간이지요.” 이 시적 공간에 둥근 테이블을 놓고 부부는 곧잘 마주 앉는다. 그의 동갑내기 아내 민미순은 피아노에 가야금에 단소에 해금에 못하는 악기가 없고 장구춤 또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데 최근엔 첼로를 새로 시작했다. 푸른 수국이 핀 저녁에 옥상정원에 앉아 아내는 연주하고 남편은 책을 읽는다.

계단참 유리집 안에 남편이 아내의 잠자는 모습을 스케치한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그 아래 붙은 글귀에 내 가슴이 괜히 찌르르하다. ‘둥근 밤에/ 달무리같이 그대를 껴안다!’ 이렇게 서로를 달무리같이, 자귀나무 이파리같이, 껴안는 부부들이 있어 세상은 아직 충분히 살 만하다. 북극 얼음이 녹아도, 방사능이 유출돼도, 황사바람이 불어와도 지상이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다. 뜰이 없거들랑 베란다에 경량토를 깔고라도 자귀나무 한 그루씩 가꾸어볼 일이다.

덧붙임: 매발톱·금낭화가 핀 정원 한쪽에 흰 자갈이 깔렸길래 이건 뭐냐고 물었다. “그 자갈은 달빛용이에요. 달이 뜬 밤에 자갈돌 위에 서면 흡사 강가에 온 것 같거든요.” 안주인 민미순의 정다운 해설이다.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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