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진보당 이해의 정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통합진보당 사태는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진보당 당권파를 지켜봐 온 사람들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다. ‘군자산의 약속’이란 문건을 보면 오늘의 사태는 이미 예정돼 있었다는 말이다.

 ‘군자산의 약속’이란 진보당 당권파의 뿌리인 민족해방(NL·National Liberation) 세력들이 2001년 9월 충북 괴산군 군자산에 모여 ‘정치판에 뛰어들 것’을 결의한 문건이다. 이후 NL은 PD들이 만들어 놓은 민노당으로 몰려갔다. ‘군자산의 약속’이란 정치활동 지침서다. 문서의 정식 명칭은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를 맞는 전국연합의 정치 조직방침에 대한 해설서’다. 다음과 같은 대목이 주목된다.

 “(민족민주) 정당은…민족민주전선체의 정치적 부대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현시기 우리가 건설해야 할 (민족민주) 정당은 변혁운동의 전 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강화 발전시켜야 할 민중정치투쟁의 조직적 무기이다.”

 쉽게 말해 정당이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정치적 부대’며 ‘조직적 무기’라는 주장이다. 정당정치가 수단에 불과하다는 인식이다. 그러면 정당정치라는 수단으로 그들이 이루고자 한 목적은 무엇인가. ‘군자산의 약속’이란 문서의 두 번째 제목에 명시돼 있다.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 정당건설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하여 연방통일조국 건설하자!!’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통한 ‘연방통일조국 건설’이 궁극적 목적이다. 북한의 연방제통일론과 일맥상통한다. 이를 위해 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운다. 결론적으로 정당을 통해 정권을 잡고, 미군을 철수시키고 국가보안법을 없앤 다음 북한과 연방제 통일을 이룬다는 계획이다.

 NL이 정당활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배경도 의미심장하다. ‘군자산의 약속’에 명시돼 있다.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를 맞았기에 정당정치에 뛰어든다는 정세판단이다. 대사변이란 6·15남북정상회담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과 ‘통일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해결해 나가자’고 합의했다. ‘우리 민족끼리’는 북한의 구호다. 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란 의미다.

 통일 전문가인 김대중 대통령이 어떤 생각에서 이 대목에 합의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NL이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당시 진보진영 전체가 진보후보(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에 대한 지지를 결의했음에도 불구하고 NL은 투표 직전 ‘김대중 지지’로 돌아섰다. NL 입장에선 김대중 대통령 지지에 대한 보답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 NL은 ‘6·15 공동선언으로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반민주적 반통일적 악법들이 사문화’될 것으로 확신했다. 그 결과 ‘향후 10년을 전후하여 자주적 민주정부가 수립’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래서 문서의 제목 첫머리가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이다. 3년의 계획은 성공했다. NL계열 조직과 인력은 3년 만인 2004년 민노당 입당을 완료함으로써 다수파가 되었다. 민노당은 그해 총선에서 10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킴으로써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10년의 전망이다. ‘10년을 전후해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목표에 따르면 11년차인 올해 집권에 성공해야 한다. 단독으론 불가능하다. 그래서 택한 전략이 ‘야권연대’라는 통일전선 구축이다. 민노당 다수파가 되면서 내쫓았던 PD 계열(심상정 대표)과 비교적 진보에 가까운 국민참여당(유시민 대표)까지 포함하는 1차 연대에 성공해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다. 지난 4·11 총선에서 민주당과의 2차 연대에 성공함으로써 무려 13석을 얻었다. 이대로 연말 대선까지 성공하면 ‘10년 전망’을 이룰 수 있다.

 10년의 노력 끝에 목표달성을 눈앞에 두고 부정·폭력사태가 터졌다. 무엇보다 정당정치를 수단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화근이었다. 통일이라는 지고지순의 목표 앞에서 정당정치의 민주적 절차 따위는 무시됐다. 민주적 정당정치를 부정하면서 제도권 정치참여에 뛰어든다는 생각부터 모순이었다. NL끼리 덮고 감추어 온 모순이 PD와 국민참여당 세력들에 의해 온 세상에 공개됐다. 그간의 성공은 스스로를 감춘 덕분이었다. 언젠가 드러날 모순이었다. 그나마 대통령 선거 이전에 드러나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