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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패션디자이너 1호 노라노가 말하는 한국패션 60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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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노라노씨가 서울 청담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뒤로 보이는 의상은 195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스유니버스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오현주씨가 입은 드레스를 복원한것이다.

1947년 서울 여의도 공항.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63년이나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패션을 공부했고 2년 후 한국에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딴 양장점을 냈다.

몇 년 후엔 대한민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고, 얼마 후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프레타 포르테(기성복) 컬렉션에도 참여했다.

‘대한민국 1호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84 본명 노명자)씨, 그가 전시회를 연다. 그의 패션 인생뿐 아니라 ‘한국 현대 패션’의 변화상과 흐름을 한눈에 보여주는 자리다. 이달 23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서울 신사동 호림미술관 JNB갤러리에서 펼쳐지는 ‘라비엥로즈展’이다. 전시는 5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우리나라 현대 패션 역사를 되돌아 본다. 또 그의 뒤를 따라 한국 패션에 이바지하고 있는 후배들도 그에게 헌정하는 작품들을 선뵌다.

기아자동차의 여성 디자이너 20명은 그의 옷에 쓰인 무늬로 장식한 특별한 자동차도 만들었다. 한 명의 패션 디자이너를 위해 업계와 기업이 함께 나서기는 한국 패션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노씨를 만나 한국 현대 패션 60년 이야기를 들었다.

패션 디자이너 강희숙씨가 그린 노라노씨 초상.

세탁 기술 때문에 짙은 색 옷 만들던 50년대

노씨는 “패션은 예술일 수 없다. 진짜 예술품은 여성의 몸”이라고 말했다. “패션은 진정한 예술인 여체를 더욱 돋보이게 돕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입을 때 불편하고 세탁이나 손질이 힘든 옷은 고객이 외면한다”면서 “그래서 1950~60년대엔 짙은 색 옷이 주류를 이뤘다”고 했다. 요즘 같으면 드라이클리닝 등 세탁 기술이 좋아 디자이너가 옅은 색 옷을 만들어도 별문제가 없지만 예전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용성을 패션의 한 덕목으로 꼽은 그는 “50년대는 영화 의상의 시대”라고 정의했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전, 한국 영화의 전성기와 함께 은막의 스타들이 입은 옷이 대중의 관심을 끌던 때였다. 최은희·엄앵란·조미령·김지미 등 당대의 톱스타들이 영화에서 그의 옷을 입었다. 그의 옷만 고집하는 스타도 꽤 많아 출연 계약서에 ‘의상은 노라노의 것만’이라는 문구를 집어넣기도 했단다.

60년대, 오드리 헵번과 원피스

기아자동차의 여성 디자이너 20명이 노씨의 의상에 쓰였던 프린트를 활용해 기아차 ‘쏘울’의 외관 디자인을 새로 했다.

1953년 개봉한 영화 ‘로마의 휴일’은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우리나라에선 55년 개봉됐는데, 오드리 헵번이 입은 공주풍의 여성적 의상은 60년대를 풍미한 스타일이 됐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1961년 개봉했는데 이때도 헵번은 주로 원피스를 입었다. 노씨는 “엄앵란씨가 귀엽고 발랄한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와 비슷했고, 엄씨가 입은 원피스가 크게 유행했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손목 위로 살짝 올라오는 길이의 소맷단과 잘록한 허리선, ‘페티코트’(치마 실루엣이 풍성하게 보이도록 입는 여성용 속치마)를 입어야 하는 풍성한 치마로 대표되는 게 이 시절 원피스 모양새다.

그는 “60년대는 텔레비전 시대가 본격화돼 TV 드라마 의상도 패션 유행에 큰 영향을 끼쳤다”며 “나옥주·사미자·윤소정·정혜선·윤여정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드라마에서 내 옷을 입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60년대까지도 패션은 즐길 여유가 있는 사람만의 전유물이었다”고 밝히며 재미난 일화를 소개했다.

“집을 구하러 다니다 보니 주부들이 집에서 속옷 바람으로 지내는 걸 봤어요. 그래서 실용적인 나일론 소재로 편하게 입을 만한 여성용 ‘점퍼 스커트’(목선이 패어 있고 소매가 없는 원피스 형태의 옷)를 만들었죠. 이걸 사입은 가정에선 몇몇 남편들이 제게 전화나 편지를 주기도 했어요. ‘(아내가 예쁜 모습으로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예요.”

노씨는 70년대에 대해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많아지면서 투피스 형태의 여성용 정장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고 기억했다. TV 드라마가 패션에 끼치는 영향력이 날로 커져 ‘드라마 의상 협찬=노라노’ 하는 식의 광고도 시작됐다. 이때부터 기성복 ‘노라노’도 본격화됐다. 또 1973년에는 ‘노라노’가 미국 뉴욕의 고급 백화점 ‘삭스’에 진출해 ‘메이드 인 코리아 패션’을 해외에 제대로 알린 시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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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 실크가 뉴욕 접수한 80년대

“1979년 미국 뉴욕의 메이시 백화점 1층 전체 쇼윈도가 모두 노라노 옷으로 채워졌다”는 이야기는 본지(2007년 2월 28일자 31면 남기고 싶은 이야기-나의 선택 나의 패션) 연재를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품을 직접 구입해 파는 미국 백화점에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쇼윈도를 새단장하는데 미국 뉴욕 7번가에 있는 고급 백화점의 1층 쇼윈도 전체가 한국 패션 디자이너의 옷으로 채워진 것이다. 노씨는 당시가 ‘실크 컬렉션 시대’라고 했다. “뉴욕의 고급 백화점 바이어들이 좋아한 것이 실크로 된 드레스, 실크로 된 바지 정장 등이었어요. 우아하고 세련된 이미지에 신사임당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독창적인 프린트 같은 것도 인기가 좋았죠. 모두 한국산 실크로 만든 것이어서 더 자부심을 느꼈던 시절이었어요.”

‘1세대 디자이너’에겐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컸던 모양이다. 노씨는 70년대부터 꾸준히 한국산 실크로 원단을 만들고 거기에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독창적인 프린트를 개발해 왔다. 기모노 제작용으로 일본에만 소량 수출하던 국산 실크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정부가 요청한 일이었다.

한국 패션, 다양성의 시대로

노씨는 “90년대를 지나면서 패션은 무엇 하나로만 정의할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설명했다. “소재에 대한 제약도 없어지고 패션을 받아들이는 사회적인 시선도 많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검은 색 옷을 즐겨 입는 그는 “검정은 여성의 자주독립을 뜻한다”고 말했다. 상복에나 쓰이던 색을 여성복에 쓰는 걸 불과 몇십년 전엔 상상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 패션이 이만큼 발전하고 내가 60년 넘게 패션 디자이너로 살 수 있었던 건 모두 고객 덕분”이라는 말을 여러 번 거듭했다. “새로운 시도를 이해하고 늘 받아주는 앞서가는 여성들이 있었기에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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