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시’에 빠져 드라마·노래 섭렵 … 일어 독학 3년 만에 자타공인 ‘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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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까이 다또 오모따 토코로가 하지마리 다카라(한계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시작입니다).” 허영은양이 일본어로 자신의 좌우명을 밝히고 있다.

지난달 19일 오후 5시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정신여고. ‘일본어의 달인’이라 불리는 허영은(18)양을 만나기 위해 3학년 6반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니 홀로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허양은 꼼짝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뭘 듣고 있길래 사람이 온 것도 모를까?’ 어깨를 툭툭 치니 그제야 허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전민희 기자
사진=김진원 기자

일본 아이돌 그룹 ‘아라시(ARASHI)’의 노래를 듣고 있었단다. “아라시를 좋아하냐”고 묻자 허양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일본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아라시 덕분이에요. 처음 알게 된 중3 때부터 아라시 노래를 듣지 않으면 잠도 안 와요.”

 그가 일본문화에 심취한 건 중2 겨울방학부터. 미국에 사는 사촌언니 집에 놀러 갔다 우연히 본 일본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통해서다. 한국에 돌아온 뒤 MP3에 일본드라마를 다운받았다. 등·하굣길이나 쉬는 시간을 이용해 보고 또 봤다.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이 마츠모토 준이었고, 그가 속한 그룹이 아라시였다. 허양의 ‘아라시 사랑’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중3 때 같은 반 친구 중에 한 명이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전학을 왔어요. 노래를 들으면서 오모이데(추억), 즈또즈또(계속), 와스레나이(잊을 수 없는)와 같이 모르는 단어를 메모한 뒤 쉬는 시간마다 찾아가 뜻풀이를 해달라고 졸라댔죠.”

 시험기간에도 아라시의 노래가 귓가에 맴돌았다. 드라마가 보고 싶어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적은 점점 떨어졌다. 중학교 입학 후 반에서 1~2등을 다퉜던 그의 성적은 수직으로 하락했다. “충격이었어요.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MP3에 저장돼 있던 수백 곡의 노래와 수십 편의 드라마를 모두 지웠다. 하지만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시 노래와 드라마를 다운받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허양은 일본어능력시험(JLPT)을 준비하기로 했다. 일본 드라마와 노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한창 공부해야 할 때 부모님에게 학업과 무관한 일본어 학원에 보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서점에서 일본어 교재를 구입해 독학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JLPT 날짜가 고1 1학기 기말고사 기간과 겹친 것이다. 내신시험과 JLPT 준비를 병행했다. 그러나 허양은 JLPT 시험장에 가지 못했다. 내신시험 준비기간에 일본어를 공부했다는 사실을 안 어머니가 일본어 교재를 빼앗고 시험 보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어머니 감미숙(45)씨는 “안 그래도 성적이 계속 떨어져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내신시험 준비기간에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기를 2~3번. 허양이 용돈을 모아 일본어 교재를 구입하면, 감씨는 교재를 뺏어다 재활용센터에 갖다 줬다.

 그러던 감씨가 허양의 일본어 공부를 지원하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감씨는 일본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일본여행을 떠나고픈 소망이 있었다. 겨울여행을 계획했지만 시간당 30만원인 통역 가이드 비용 때문에 고민했다. 여행계획을 포기하려는데 허양이 가이드를 자처했다.

 허양은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그해 10월 본격적으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2개월 만에 JLPT 3급을 땄다. 결국 허양의 도움으로 그해 12월 감씨는 부모님과 함께 일본여행을 무사히 다녀왔다. “영은이가 기대 이상으로 통역사 노릇을 톡톡히 했어요. 아버지가 ‘우리 손녀 최고’라며 흡족해 하시더군요. 혼자 힘으로 다른 나라 언어를 익힌 딸이 대견했습니다.”

 2학년에 올라가서도 허양은 일본어 공부에 매진했다. 1년 만에 JLPT 2급, 1급 시험에 잇따라 합격했다. 드라마를 보며 시작된 일본어에 대한 관심은 허양을 ‘일본어 고수’로 만들었다. 같은 학교 친구들은 물론 교사들도 그를 ‘일본어 달인’이라 부른다.

 이제는 사물을 보면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먼저 떠오른다. 내신시험 공부를 할 때도 일본어로 중얼거리며 내용을 암기한다. 허양에게 일본어 공부는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다. “세계적인 무역업자가 되고 싶어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한 분야에 미친 사람한테는 당할 수 없다고 하잖아요. 대학에 가서는 국제무역학에 미쳐보려 합니다. 스페인어·중국어·프랑스어를 공부해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무역업자가 될 거예요.” 짤막한 다짐을 일본어로 요청했다. 대답이 나오는 데 3초도 걸리지 않았다. “私の未?を期待して下さい(저의 미래를 기대해 주세요).”

‘우리 학교 달인’ ‘우리 학교 괴짜’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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