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구, 미당 영전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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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선생님 영전에

미당 선생님, 꼭 이렇게 세상을 놓으셔야 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오늘로써 이 세상과 영이별을 하셔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인생은 오로지 만나고 헤어지는 슬픔을 배우려고 태어난 존재밖에 더 되겠습니까.

미당 선생님, 그러나 저와 저희 같은 무리들은 선생님과 더불어 한 세상을 살았기에 선생님의 문자로 그동안 '참 많이도' 행복했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늘 밥이고 찬이었고, 술이고 안주였고, 노래고 탄식이었고, 웃음이고도 울음이었기에 저나 저와 같은 무리들은 늘 배가 부르거나, 늘 술이 거나하거나, 흥에 겨워 뒤떠들거나 한이 맺혀 두런거리거나 하기 마련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시문학개론' 과 '시실기' 시간에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았던 하고많은 문하생 가운데의 하나로, 선생님의 공덕동 시절부터 하고한날 문턱을 닳리다가 어느 해인가부터 갑자기 정초의 세배조차 발길을 끊은 문밖의 제자이니, 이제와서 영전에 무릎을 꿇은들 과연 무슨 용서가 되겠습니까.

이제서야 사뢰옵건데 저는 제가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펴낸 이른바 '친일문학선집' (1985, 실천문학사)
에 선생님의 글을 게재한 뒤에 선생님의 노여움을 지레 짐작하여서 감히 찾아뵙기가 두려웠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또 그 무렵에 위장이 몹시 상하여 여러 해째나 술을 끊고 지낼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여러 공석에서 가끔 뵙게될 때마다 노여워하시긴 고사하고 당신께서 먼저 반색을 하시면서 "너는 왜 요새 잘 보이지 않느냐?" 하고 섭섭해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위장에 탈이 난 탓이라고 둘러대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을 뵈우면 몸둘 바를 알지 못하여 얼떨결에 한 딴소리였으니, 그 눈치인들 왜 모르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선생님은 번번이 이르셨습니다.

"어서 속 고쳐가지고 오너라. 아아, 우리는 어여튼 한잔 해야 하거든!"

우리는 어쨌든 한잔 해야 한다! 제가 비록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기는 하나 선생님의 이르심을 누구보다도 깊이 새겨듣고 있었습니다.

그 친일 작품 건으로 하여 빚었던 유감을 진작에 풀어버렸노라는 말씀이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전에도 선생님이 텔레비전에서 하신 바 '해방이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는 해명이야말로 정녕 '미당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가장 미당다운' 대답이며,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예컨대 오답을 유도하거나 위답을 기대하는 뒤틀린 심사와 무엇이 다르겠냐고 되묻곤 해왔습니다.

선생님은 어디선가 '60년동안 써먹은 가슴이라 심장이 아플 수밖에 없다' 고 당신의 환후를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시를 좋아한 사람치고 가슴이 아리지 않을 수 없는 말씀이셨습니다.

하오나 그 60년, 아니 팔십 평생의 가슴앓이는 편편이 시가 되고, 그 시는 마침내 국민적인 유산 상속으로 하늘을 찌르도록 쌓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선생님의 모든 작품은 역사적 고전의 집대성인 당시 (唐詩)
와 쌍벽을 이루는 한시 (韓詩)
이며, 또한 현대적 고전의 집대성이라고 일러 온 지가 벌써 오래였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보실 적마다 이르시기를 "술은 반드시 청탁을 가리되 부디 족보 있는 술을 마시거라" 하시고 저의 대중없는 술버릇을 걱정하셨습니다.

꼭 상표가 있는 술을 마시고 동동주니 특주니 하는 이름없는 술에 속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30년동안 그 뜻을 받들어 지금도 아무 술이나 입에 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찌타 하필이면 "아아, 우리는 어여튼 한잔 해야하거든!" 하셨던 하해지택 (河海之澤)
은 이날껏 받들지 못했는지 참으로 어이없고 한탄스럽습니다.

아아, 이 불초한 것이 선생님께 이미 신화 (神化)
하신 날에야 비로소 한 잔 술을 올리오니 영현이시여, 흠향하옵소서.

이문구 <소설가.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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