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재미·교육성 잘 버무린 EBS

중앙일보

입력

'습관 되면 좋다' 는 광고 카피가 있다. 어떤 일에 재미를 붙여 고정적으로 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괜찮은 사람으로 달라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의미다.

이 반대의 경우도 있다. 즉 습관 되면 안 좋은 일도 세상엔 많다.

재미의 줄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은 위로는 감동, 아래로는 중독이다. 처음엔 호기심에서 시작하다가 차츰 친근감으로, 마침내는 그 재미의 대상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금단현상이 벌어지는 게 중독이다.

알콜중독.약물중독.도박중독에서 최근엔 인터넷중독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중독되면 대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다. 마침내는 자기 자신마저도 잃게 된다.

국민 대다수가 TV를 하루에 3시간 넘게 본다는 통계가 있는데 그렇다면 이건 거의 중독 수준이다. 리모컨이 생긴 후로 '파도타기' 식으로 채널 선택하는 사람(플리퍼족) 이 늘었는데 그들은 여기저기 화면을 기웃거리다가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문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지루해지면 그냥 떠나버린다. 아예 케이블을 신청한 후 마음에 드는 채널을 고정해 두다시피 하는 경우도 있다.

짐 캐리가 나온 '케이블 가이' 라는 영화가 있다. 작품 의도가 딴 데 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전편에서 TV중독을 염려하는 감독의 시각을 발견했다.

주인공이 한 대상에 대해 집념을 넘어 집착의 단계에 이른 데는 어릴 때 자신을 묶어 두었던 TV가 그 역을 톡톡히 했다.

유년기 혹은 청소년기의 시청습관은 실로 중요하다. 어릴 때 좋아하던 맛의 세계가 평생을 함께 가는 것과 같다.부모의 역할이 엄청나다. 과외 보냈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바보상자 속엔 바보만 사는 게 아니다. 꽤 영리한 친구들도 있다. 한번 교육방송에 채널을 맞춰 보자. 공부라면 지긋지긋한데 TV를 보면서까지 공부하는 건 정말 싫다며 지레 겁먹지 말 일이다.

'우리 미술 바로 보기' '책으로 읽는 세상' '하나뿐인 지구' '미래토크 2000' 등 책읽기는 싫어하지만 교양만큼은 좀 쌓아두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픈 메뉴가 그득하다.

지난 가을 개편에서 EBS는 경쟁력 있는 채널을 표방하고 연예인을 대거 MC로 쓰는 등 이른바 '볼 만한 채널' 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볼테면 봐라 우리는 만든다' 하던 예전의 고압적(자포자기적?) 자세와는 다르다.

'삼색토크여자' '퀴즈 천하통일' 등 제목부터가 기존의 교육방송 이미지를 벗어던진 프로그램들이 탄생했다.

'교육방송이면 교육방송답게' 라는 사람들에게는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단 눈길을 잡은 후 좋은 내용으로 마음까지 잡겠다는 전략이니 조금 참아줄 필요도 있다.

TV가 재미없어져야 한다는 말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의 영토를 무한히 확장하자는 말에 동의한다. 인기 연예인이 나와 왁자지껄 떠들어야만 재미있다고 느끼는 건 이미 TV의 오락문법에 길들여진 것이다.

어쩌면 중독이 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길들여지는 게 기분나쁘다면 스스로 편성 시간표를 짜라. 교육과 방송의 공통점은 그것이 인간을,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방송에 채널 맞추기. 습관 되면 좋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