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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역사학의 온전한 정립을 위해

중앙일보

입력

e메일 아이디로 commun을 쓰는 친구가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앞 글자라고 자신은 우기지만, 꼬뮤니즘 냄새가 나서 눈길이 가는 아이디입니다. 하기야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어도, '나는 사회주의자다' 혹은 '나는 공산주의자다'라고 공언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공산주의, 사회주의라는 말은 꺼내기도 힘들었고, 그걸 공부하는 일은 더더욱 생각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현대사를 온전히 들여다보기 위해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공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투쟁은 주로 민족주의 계열의 운동 부분만을 서술할 뿐,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은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지요. 남과 북이 하나로 되기 위해서는 남과 북의 역사를 올바르게 돌아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는 필요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사회주의의 역할에 대한 연구 성과를 모은 책이 나왔습니다. '한국 현대사와 사회주의'(성대경 엮음, 역사비평사 펴냄)가 바로 그 책입니다.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을 제거하고 평화 체제를 정착시키며 남북통일의 기운을 촉성하는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부과된 민족적 임무라고 생각할 때, 역사학자들은 남북조선 7천만 민족 구성원의 역사인식을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이 책 7쪽에서)

남쪽에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남북 화해의 전제조건이듯, 한국 현대사를 돌아볼 때,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 해방투쟁에 나섰음을 인정하는 것은 통일 역사학 수립의 전제라는 게 이 책을 엮은 역사문제연구소 고문 성대경 님의 생각입니다.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비롯, 한국 사회주의의 역사에 관한 주요한 문제들을 다룬 9편의 논문을 모은 이 책은 전에 볼 수 없던 새 발굴자료를 많이 들춰내고 있으며, 각각의 상황에 대한 필자들의 주장 역시 이전과 달리 참신한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다룬 전명혁 님의 글은 당시 사건에 대한 참신한 해석으로 눈길을 끄는 글이며, 경상북도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을 다룬 김일수 님의 글은 지방사 연구의 어려움을 딛고 현장을 철저하게 답사하며 성실하게 발로 써낸 글이지요.

특히 경북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을 다룬 김일수 님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1920년대 경북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이 전국적인 흐름과 함께 전개됨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대구노동공제회의 활동, 강택진의 토지기증, 사회운동자동맹의 활동 등 경북지역의 양상이 전국 사회운동의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이 글은 꼼꼼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 운동이 지도부의 분열로 인해 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 지속적인 항쟁으로 이어가지 못한 결정적 한계였다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나라 밖 망명지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이 책의 제2부가 바로 '망명지의 사회주의자들'입니다. 이 가운데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 그룹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글은 이르쿠츠크에 본거지를 둔 초창기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1920년 7월부터 12월까지 31차례에 걸쳐 열었던 회의 기록을 분석한 것입니다. 이 회의록에는 시베리아에서 한국 사회주의 운동을 개척한 사람들의 동향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어 중요성을 갖고 있지요.

또 일본의 김천해, 만주지역의 허형식 등을 중심으로 펼쳐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사례연구도 볼 거리입니다. 이같은 기록들은 그 동안 조선총독부 측의 기록 위주로 살펴 보던 역사 연구와 달리, 운동의 주체인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어 이전의 연구와는 사뭇 다릅니다.

이 책의 제3부 역시 현대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제3부는 일제 패망 후 분단 고착화 과정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살펴본 것이지요. 해방 전후사, 특히 그 시절의 사회주의 계열 운동에 대한 연구가 태부족한 우리에게는 귀중한 연구 성과가 될 것입니다. 여순사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등에 대한 연구가 바로 그것이지요.

바야흐로 남과 북이 하나가 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시절입니다. 한쪽에서는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간주하고, 한쪽에서는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참으로 야릇한 상황이 거듭되고 있는 현실은 어쩌면 우리의 현대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남북이 하나로 통일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반쪽짜리 우리 민족사를 온전하게 복원하는 일이겠지요.

그런 뜻에서 이 책은 우리 역사학계가 지금 곧 서둘러 해야 할 일의 방향을 잡아주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것이고, 이같은 역사 연구가 보다 활성화되는 날, 별다른 뜻 없이 commun 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친구를 바라보며 커뮤니케이션보다 꼬뮤니즘을 먼저 떠올리는 쓸데없는 생각도 털어버리게 되겠지요.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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